1974년 가을 시사만화가 안의섭(작고) 화백과 일본 최대의 민방인 TBS초청으로 방송국을 시찰한 뒤 전 아사히신문 정치부장을 지낸 미우라 고고로(三浦甲五郞) 보도담당상무와 저녁을 함께 한 자리에서였다.
“한국은 참 대단한 나라입니다. 북한의 도발위협과 경제난 속에서도 기자들의 정신이 시퍼렇게 살아있으니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통행금지하에서도 태연히 술을 마시며 열띤 토론을 벌이는 기자들의 정열은 참으로 부럽더군요. 일본 기자들은 자유와 풍요속에 정신들이 풀어져 한심한 지경인데…”
1960년대 하면 6·25의 산물인 통행금지(자정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를 떠올리게 된다.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매일 밤 4시간씩 남한 전역을 ‘활동정지’상태로 만든 통금은 기자들과 유별난 인연을 갖고 있었다. 매일 저녁 7∼8시가 되면 상당수의 기자들(주로 정치부)은 무교동 골목 일대의 낙지집, 동동주집, 특주집으로 몰려든다. 물론 같은 시간 내자동 쪽의 대머리집 등도 만원을 이룬다. 안주라야 마른 북어, 땅콩, 두부, 낙지 등이 고작이지만 마음껏 떠드는 와중에도 뉴스에 관한 정보를 교환·수집한다.
밤 10시 30분이 되면 집이 먼 사람들은 슬슬 일어나고, 11시가 넘으면 잔 비우는 속도가 빨라지고, 11시 30분 예고사이렌이 울리면 만취파와 적당히 취한 파, 귀가파와 자리 고수파로 갈려 일부는 서둘러 몇 잔을 마신 뒤 뛰어나가고 나머지는 신문사 지프차를 부르거나 아예 회사로 향한다.
신문사 차도 경찰과 사이가 괜찮을 때는 통금 중에도 프리패스여서 텅빈 거리를 호쾌하게 질주, 귀가할 수 있지만 신문에 “경찰, 소매치기 못잡아” “경찰비리 증가”식의 보도가 나가면 어김없이 기자들을 잡아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도록 보복을 가한다. 경찰과 신경전때 꼭 귀가하기 위해서는 전보배달 오토바이나 오물 푸는 차에 편승하는 편법을 활용한다.
조간 기자들이 9시께 중앙청 기자실에 가면 벌써 나온 석간 구미들은 취재에 열을 올리다 오전 11시께 석간들이 숨을 돌리면 이번에는 오후 2∼3시까지 조간팀들이 중앙청의 각 부처·기관들을 뛰어다니곤 했다.
나라도 국민도 모두가 어렵고 가난했던 이 시절, 레저란 단어조차 몰랐던 이 시절, 각 기자실에서는 포커와 화투놀이가 성했다. 무슨 큰 돈을 건 도박이 아니라 점심 또는 담배내기 수준의 심심풀이였다. 중앙청에 출입한지 몇달이됐을 무렵 국무총리를 따라 20여명의 기자들이 기차로 부산을 다녀올 때 일이다. 포커꾼들 5∼6명은 서울역을 출발하면서 손운동을 시작, 부산시내 호텔에서 식사도 거른채 계속했다. 기사는 풀담당이 이미 중앙청으로 보낸 터였다. 다음날 오전 일정을 끝내고 오후 2시께 서울행 열차에 오르자 정일권 총리까지 꾼들이 안보인다고 걱정했다. 이윽고 기적이 울리자 포커꾼들이 나타나 허둥지둥 올라탔고, 포커는 차중에서도 계속됐다. 밤 10시를 넘어 서울역에 도착하자 꾼들은 인근 텍사스촌인 양동의 여관으로 이동했고 밤 새워 포커를 했다는 얘기를 듣고 “이거 너무 심한 것 아닌가”하며 착잡해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당시 포커꾼들에게는 ‘겜뻬이(헌병)’라고 불리우는 무서운 천적이 있었는데 그 분은 언론계의 대원로인 큰 홍박 홍종인 선생이었다. 이때 홍 선생은 후배들의 취재활동을 점검·독려하기 위해 중요 기자실들을 불시에 방문하곤 했는데 어느날 오후 중앙청 기자실을 기습했다. 홍박은 갑자기 문을 열고 꾼들을 향해 큰 소리로 “손들어!”라고 외쳤고 순간 엉거주춤 일어선 꾼들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양손을 번쩍 든 사람, 손을 든채 증거물(카드)을 구겨서 뒤로 던지는 사람, 카드를 옆으로 미는 사람, 판돈을 움켜든 사람 등 가지가지였다. “이게 뭐야! 한심한 것들. 이러고도 기자야! 소속사와 이름을 대. 발행인들에게 알려 목을 자르라고 해야지.”
홍박이 일장훈계를 하는 동안 다른 기자들은 “선생님 옳습니다. 암요. 혼을 내야합니다”라고 연신 거들었다. 하지만 홍박은 대인인지라 한번도 소속사에 통보한 적이 없었고 꾼들은 다음날에도 취재가 끝난 뒤 무용담을 나누며 여전을 판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