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동료 기자 얘기를 잠깐 하고 싶다. 어떤 곳에 취재를 갔는데 취재원이 회사 간부 이름을 팔면서 기자를 경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더란다. “아무개 잘 알죠? 나하고 친합니다.” 그 예의범절 없는 취재원이 회사 간부와 진짜 친한 사이인지 어떤 지는 알 수 없지만 말하는 태도가 하도 고깝게 느껴져서 툭 쏴붙였단다. “아무개요? 잘 알죠. 그 사람하고 저하고는 상극입니다. 사이가 아주 안 좋죠.” “........”
이야기 둘. 평소 왕래가 많지 않은 친척 어른들이 난감한 부탁을 해왔다. 불미스런 일들에 휩싸여 있는데, 상대방으로부터 보상을 많이 받게 해달라고 했다.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는것이 기자 아니냐”는 말과 함께.
욱! 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삭이느라 무지 애먹었다. 민원 내용을 일부러 잊어먹었다. 그 후로 그 어른들과는 무지무지 서먹서먹해졌다.
이야기 셋. 기자 생활하는 사람 치고 말도 안 되는 ‘민원’이나 ‘청탁’ 때문에 마음 고생 한두 번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기자 생활 초기에 적응하느라 가장 애먹었던 것은 ‘엽기적’인 노동 강도뿐만이 아니었다.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하는 회사 안팎의 사적인 부탁(사실 말이 부탁이지 강요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난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지금은 민원과 청탁을 ‘상대방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하는 방법을 나름대로 터득해가고 있지만 여전히 골치 아픈 문제다. 특히 민원 성격의 제보나 제보를 빙자한 민원을 받고 보면 여전히 난감하다. 염치가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이야기 넷. 지금도 참 많은 전화를 받고 참 많은 사람을 만난다. 세상 변한 줄도 모르고 고위층 빙자해서 회사 간부 빙자해서 이런 저런 민원을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그런 사람들은 99.9% 염치가 없다. 다행히 기사거리가 되면 좋은 제보로 탈바꿈하지만 대부분 기사거리가 안 된다. 특히 부당한 내용의 민원은 기자들에겐 쓰레기일 뿐이다. 그것도 재생 불량성 쓰레기다.
혹시나 기자들 스스로 ‘그렇고 그런’ 민원과 청탁이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지는 않았는지, ‘좋은 게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빌미를 제공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할 일이다.
조금 전에도 회사 동료 이름을 파는 아주 이상한 전화를 받았다. 점잖게 전화를 끊은 뒤 ‘욕설이라도 퍼부어 줄 것을…’하는 쓸데없는 후회를 해 봤다. ‘민원’과의 전쟁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