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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5월, 우리의 자화상

배병문  2001.05.19 00: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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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난로 위에 올려진 양은 주전자에선 김이 모락모락 새어나온다. 창밖에는 찬바람과 함께 눈이 내리고 낡은 책상에는 온통 종이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검은 외투깃을 잔뜩 올린 몇몇 사내들이 담배를 입에 물고 펜을 열심히 놀리고 있다. 굵은 검은테를 뒤덮는 머리를 쓸어 올리는 그들. 하지만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번뜩인다.

장면 2. 한창 기사마감에 바쁜 시간. 편집국 안이 잠시 소란하다. 탁탁탁 둔탁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검은 선글라스를 낀 낯선 사내들이 뛰어 들어온다. 그리고는 한 사내의 팔목을 비틀어 양쪽에서 팔짱을 낀 채 황급히 계단을 내려간다. 그리고 신문사 앞에 주차해놓은 짚차에 짐짝처럼 집어넣는다. 하지만 떠나는 차창 사이로 손을 들어 보이는 사내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스친다.

장면 3. 손에 손에 피켓을 들고 플래카드를 앞세운 한 무리의 사내들이 어느 신문사 앞에 도열한다. 그들은 ‘늙은 언론인의 노래’를 목청껏 부른 뒤 악덕사주의 노조탄압과 지면훼손을 성토한 뒤 사내진입을 시도한다. 한차례 경비들과 몸싸움이 끝난 뒤 그들은 무심코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민주언론 탄압하는 OOO은 각성하라’는 메아리 없는 구호를 외치며 총총히 거리 속으로 사라진다.

격변기 한국근대언론사를 되새기면 떠오르는 장면들이다.

50~60년대 희미한 백열등 밑에서 잉크를 묻혀가며 한줄한줄 빈칸을 메워갔던 언론인들. 가난한 시절. 좌우대립과 이승만 독재정권의 탄압 속에서 자신이 믿었던 정조와도 같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 언론본연의 자세를 지켜내기 위해 언 손을 불어가며 그 시대정신을 써내려가던 기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기자라기 보다는 차라리 지사였다.

군사독재시절. 박정희 정권과 이어진 전두환, 노태우라는 군사정권의 사생아들은 언론에 재갈을 물려갔다. 펜보다는 몽둥이와 총칼이 앞섰던 시절. 기사검열과 연행, 고문. 그리고 해직으로 얼룩졌던 한국언론의 암흑기였다. 많은 언론인들이 펜대를 꺾기도 했고 스스로 무뎌져가던 시절. 하지만 자신의 인생과 삶을 송두리째 바치면서 온몸으로 언론자유의 기치를 지키려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투사였다.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총칼보다 자본이 언론을 옥죄어 왔다. 자본의 시녀가 되기를 강요당했고 거부하는 언론인은 거리로 내몰렸다. 서둘러 노조를 만들어 서로의 손을 맞잡고 언론개혁과 민주언론을 외쳤지만그들에게 돌아온 대가는 감방의 차디찬 냉기와 굴곡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언론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빛나는 훈장이 가슴에 별이 되어 박혔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한국언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산천이 한번 변한 지금. 정보화 시대와 극악한 자본의 논리, 자사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슬픈 이 시대. 기자라기보다는 직장인으로서 소속사의 논리에 철저히 자신의 몸을 맞춰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먼 훗날 우리의 뒤를 이을 후배기자들은 이 시대를 어떻게 평가하고 우리를 어떤 언론인으로 기억할까. 2001년 5월 중순, 한국 언론인의 자화상은 무엇일까.



배병문 |경향신문 체육부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