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언론계 후배로부터 1960년대 중반 기자들이 즐겨했던 레저나 취미생활에 관한 질문을 받고 잠시 당혹감에 잠겼다. 국민도 정부도 가난하고 어려웠던 때라 레저나 취미생활이라는 단어를 몰랐었다.
이 시절 중앙청 기자들의 유일한 레저(?)는 영화관람이었다. 공보처 산하 국립영화제작소가 중앙청 구내에 있어 그곳 시사실에서 최근에 들여온 외국영화중 막 검열을 끝낸 프로들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시사실에서 감상하는 영화중 최고의 명품은 심사도중 외설에 걸려 가위질한 것을 이은 Something 필름.
1∼2개월 분량을 모아 작품이 완성되면 소장이 살콰주(공보장관) 몰래 연락을 해주었다. 이날은 다른 출입처 기자들도 귀신같이 알고 몰려와 대성황을 이뤘고 상영도중 “야, 천천히 돌려” “감았다 다시 돌려” “야 임마! 기분 좀 나게 돌려봐”라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폭소가 연발했다. 언제나 잔뜩 기대했지만 끝나면 저마다 실망어린 표정들이었다.
중앙청·외무부 출입시절 필자가 남달리 감회를 느낀 곳은 중앙홀이었다. 이곳은 8·15 이후 미군정 시절에는 하지사령관이 대형 회의를 주재하거나 직원 월례회를 가졌던 곳이고 군정 자문기관인 입법의원(의장 김규식 박사)의 회의실이었다. 또 1948년 5월 10일 초대 국회의원선거가 끝난 후에는 대한민국의 첫 국회의사당이 되어 단군이래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민주헌법을 만들고 민주독립국가를 탄생시킨 한국헌정사의 산실이었다.
제헌국회는 5월 31일 이 홀에서 개회한 후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본회의를 소집, 헌법제정안을 놓고 40여일간 3독회까지 거치는 정밀심의 끝에 민주헌법을 통과시켰으며 7월 17일 이곳에서 헌법공포식을 거행했다.
필자를 감동하게 한 것은 회의 모습이었다. 의견이 갈리고 논쟁이 계속되면 이곳 저곳에서 노(老)의원이 일어나 “선열들은 목숨을 바쳐 항일투쟁을 벌였는데 조그만 문제로 논쟁만 할 것인가” “새 나라 건설을 기대하는 국민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질타하면 격론은 가라앉고 회의는 물 흐르듯 진행됐다. 제헌의원들은 모두가 애국자요, 국민의 진정한 공복이자 대표였다.
의사당은 정략도 욕심도 사심도 없었고 오직 애국애족의 열정으로 가득찼다. 민주주의에 관해 아무런 경험도 없는 제헌의원들이 어느 선진민주국가의 헌법에 못지않은 훌륭한제헌헌법을 만들어낸 것은 순수한 애국단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53년 헌정기간중 임기는 비록 2년이지만 재헌국회가 가장 순수했고 민주적이었으며 또 생산성이 가장 높았다고 생각한다.
제헌국회는 회의중 의원들이 박수를 많이 친 국회였다. 누가 이치에 맞는 의견을 밝히거나 즉석에서 애국적 연설을 할 때마다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때문에 거의 사회를 도맡았던 신익희 부의장은 “신성한 의사당에서는 박수를 치지 않는 것”이라고 되풀이 당부했지만 박수는 계속됐다.
제헌의원들은 참으로 검소했다. 자가용이 있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전차나 역마차를 타고 등원했다. 지방출신 의원들은 인왕산 창성동에 있는 숙소에서 합숙을 하며 낡은 버스로 등원했지만 어느 누구도 불편을 얘기하지 않았고 세비 증액을 요구하지 않았다.
모든 나라마다 헌법을 제정·공포했던 기념관을 갖고 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 동경의 헌정기념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의사당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초대 국회의사당이 어디이고, 어디서 헌법이 제정·공포됐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YS가 총독부(중앙청)건물을 철거하더라도 첫 의사당이며 헌법을 통과시켰던 중앙홀은 독립기념관이나 국회헌정기념관 등에 모형으로라도 보존했어야 했다.
제헌국회 뿐인가. 2대 국회의 첫 집회도 이 홀에서 열렸고 6일만에 북한군이 남한을 불법으로 기습남침하자 만장일치로 수도(서울) 사수결의를 한 곳도 이곳이었다.
필자는 중앙청·외무부 출입시절 하루에도 몇차례씩 청내를 오르내리며 중앙홀을 내려볼 때마다 20여년전 의원들의 사심없는 애국열정을 되새기며 감회에 젖곤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