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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 3공화국`시절`한·일협정`계기로`외무부`기자실`독립

박`정권`대일`청구권`자금`조기`도입`급급

이성춘  2001.06.08 21:2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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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한`협정`체결로`현재까지`피해`남아





1967년 중반 필자는 중앙청에서 외무부로 출입처를 옮겼다. 당시 외무부가 중앙청 청사내 3∼5층에 있어서 옮겨봤자 기자실이 있는 2층에서 5층으로 올라간 정도였지만 중앙청과 외무부의 취재환경과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중앙청은 각 언론사마다 2∼3명의 기자가 있어서 역할 분담에 의한 공동취재가 가능하고 서로 의지할 수 있으며 개인 시간도 낼 수 있었으나 외무부는 1인 출입처로 진작부터 취재경쟁이 뜨거운 곳이어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외무부와 외무부 기자실의 발자취부터 소개해야겠다. 외무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때 정부조직법에 의거, 서열 1위 부처로 출범했으나 주업무인 ‘외교’ 자체가 없다시피한 상태여서 실제는 가장 허약한 부처였다. 정부수립후 1950년 6·25 전쟁때까지 해외공관이라야 워싱턴의 대사관과 LA·샌프란시스코·호놀룰루의 총영사관, 중국(남경)에 공사관, 홍콩에 영사관, 그리고 주일대표부가 전부였다.

이 시절의 에피소드. 김용식 호놀룰루 총영사는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서 이 대통령이 “짐으로 부치면 돈이 많이 드니 직접 들고가게”하며 건넨 ‘∼총영사관’이라고 쓴 놋쇠현판을 받고 운반하느라 땀을 뺐다. 김 총영사는 미국서 참모학교를 이수하고 낡은 소함정을 끌고 귀국하는 정일권 준장과 손원일 제독을 위해 만찬을 베풀었는데 파티 도중 AP기자로부터 6·25 소식을 듣자 파티장은 울음바다가 됐으며 “빨리 귀국해서 나라를 구하자”며 파티를 서둘러 끝냈다고 생전에 필자에게 술회했다.

초기 외무부는 중앙청내에 30여명의 직원으로 운영됐으나 구미 외교위원부 시절부터 ‘외교의 귀신’이라는 이승만 대통령이 그나마 외교를 관장하고 100달러 이상의 외화사용 역시 경무대(현 청와대)의 결재사항이어서 외무부는 경무대의 부속실이나 다름 없었다.

외무부는 한국전쟁중 부산으로 피난, 20여명의 직원으로 간신히 유지하다가 1953년 환도후에는 현 코리아나호텔 건너편의 4층짜리 허술한 단독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외무부가 힘도 없고 점잖은 조정환 장관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시절, 이 대통령 내외의 각별한 총애를 받던 안하무인격의 유태하 주일공사(나중에 대사가 됨)는 일시귀국 때마다 본부를 무시한 채 공항에서 경무대로 직행, 직보하고 유유히 귀임해 젊은 외교관들은 부글부글 속을끓였다.

오만함과 권세를 자랑하던 유 대사도 4·19로 이 대통령이 하야하자 동경대사관에 난입한 재일동포 청년들에게 수모를 당한 끝에 사임하고 말았다.

정부수립 때부터 외무부에는 독립적인 기자실이 없었고 중앙청 기자들이 경무대와 외무부를 함께 출입했다.

1950년대 내내 민주당 내각 때까지 외교적 이슈는 한·일 회담, 평화선, 일본어선 나포, 그리고 유엔에서의 북한규탄 및 고립외교였다. 이것이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64년 1월 민정으로 복귀, 제3공화국이 시작되면서 박정희 정부가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식량 문제 해결과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한·일협정 교섭에 나서면서 외무부는 보강됐고 기자실도 독립하게 된 것이다.

군정기간중 일본과 비밀리에 협상을 벌였던 한·일 협상은 민정복귀후 본격화됐고 1964년 7월 옥스포드대학을 나왔다는 38세의 이동원씨가 외무장관에 취임함으로서 주역으로 등장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일 협정을 매듭짓기로 결심한 박 대통령은 외무장관 인선을 두고 무척 고심했다. ‘굴욕외교’ ‘매국외교’ ‘제2의 이완용이 되려는가’라며 상당수의 국민, 학생, 야당이 한·일 협상을 격렬히 반대했고 웬만한 인사들은 겁을 먹고 장관직을 사양했다. 결국 배짱과 모험심, 엉뚱한 영웅심을 지닌 젊은 이 장관을 발탁한 것이다.

이 장관은 1년 2개월 동안 박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속에 민간·재야의 거센 반대를 때로는 극복하고 때로는 즐기면서 결국 65년말 협정을 완성, 국교 정상화를 이룩했다. 문제는 당시 박 정권이 청구권 자금의 조기도입에 급급한 나머지 협정체결을 서둘렀다는 점이다. 결국 굴욕적이고 부실한 협정을 체결했고 지금까지도 종군위안부 문제, 민간인 피해보상 등에 대한 사죄와 배상이 이뤄지지 않은 데다 일본이 오만하게 침략만행을 왜곡하고 있음은 정부의 실책이 아닐 수 없다.

이 전 장관은 재임중 한·일 협정 외에 국군장비 현대화 지원을 위한 브라운각서 조인과 한·미 행정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미국이 한국에 갑자기 호의와 성의를 보인 게 아니라 수렁에 빠진 월남전에 한국이 맹호부대 외에 1개 전투사단(백마부대)의 추가파견 요청을 수용한데 대한 대가였다.

<전 한국일보 이사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