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후 최초인 1998년의 수평적 정권교체,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으로 한국은 중대한 역사적 전환기에 들어섰다. 한국의 민주화, 그리고 남북한간 화해의 순조로운 진행 여부는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나아가 전세계의 평화와 안정, 번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언론의 역할은 지대하다.
그러나 2001년 벽두부터 김대중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등에 의해 촉발된 ‘언론개혁 논쟁’으로 한국의 언론계 내부는 물론 정치권, 시민사회에서도 심각한 대립양상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언론이 맡은 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번 논쟁이 건전하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마무리돼야 한다.
우리는 한국 언론의 과거와 현재에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음을 직시한다.
▷1987년 이후 언론자유의 회복은 언론인 스스로의 투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시민들의 민주화 투쟁에 힘입은 것이다.
▷한국의 언론매체는 군사정권 시절에 저지른 잘못들(고의적이든 타율에 의한 것이든)에 대해 공개적인 사과·시정 또는 청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보도와 논평 과정에서 현장 언론인들의 영향력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반면 족벌 언론사주와 대자본의 영향력은 더욱 더 커지고 있다.
▷언론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약화됐으나 아직도 방송 등 일부 매체에 대해서는 인사권 등을 통한 정부간섭의 소지가 남아 있다.
▷한국의 신문시장은 의견의 다양성보다는 획일적·소모적 물량경쟁에 의해 규정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일부 보수적 신문들의 독과점이 심화되고 있다.
▷이들 일부 보수 신문들은 1990년대 이후 치러진 2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객관적 사실 전달자 및 공정한 심판의 역할보다는 스스로 권력을 창출하려고 시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앞으로도 이들 신문은 권력에 대한 비판과 감시보다는 킹메이커의 역할에 탐닉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는 한국 언론이 한국의 민주화와 남북화해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수적이라고 본다.
▷보도와 논평과정에 대한 언론사주, 대자본, 정부의 간섭은 배제돼야 한다.
▷소모적 물량경쟁을 지양하기 위해 신문기업의 경영은 투명해져야 하며 신문시장의 거래질서는 정상화돼야 한다.
▷민주사회의 요체인 다양성 유지를 위해 소수 언론에 대한(특히 지방지를포함하여)사회적인 지원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전세계 100여개국 50만 현직 언론인의 결집체인 IFJ는 지난 1988년부터 기자협회, 언론노조, 시민단체 등이 주도한 한국의 언론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으며 1991년에는 조사단을 직접 파견, ‘한국의 언론자유보고서’를 펴낸 바 있다. IFJ는 이 보고서에서 독립성 확보 및 전문성 제고가 한국 언론의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지적했으며 이같은 지적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IFJ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언론개혁운동이 1988년부터 현장 언론인 및 시민들에 의해 편집권 독립, 언론자정, 수용자 감시 운동 등 여러 형태로 계속돼 온 언론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 이같은 언론개혁운동이 한국 언론의 독립성 확보 및 전문성 제고에 중대한 기여를 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한국의 언론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이다. 양심적인 언론인들과 시민세력의 언론개혁 노력을 적극 지지한다.
2. 언론개혁의 궁극적 주체는 언론인 자신이다. 한국 언론의 독립성 및 전문성 제고를 위해서는 언론인들의 부단한 주체적 노력이 전제돼야 한다.
3. 언론개혁은 정파적 득실에 대한 고려없이 모든 이해 당사자들의 적절한 참여하에 공정하게 진행돼야 한다. 이런 점에서 언론개혁시민연대가 지난해 7월 제의한 국회내 언론발전위원회가 언론개혁을 위한 최적의 공론장이 될 수 있다.
4. 한국의 방송민주화 과정에서 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위해 투쟁해온 공영방송 노동조합에 지지와 연대를 표명하며 앞으로도 공영방송의 역할과 공헌이 한층 심화되기를 기대한다.
5. 김대중 정부의 언론개혁 조치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정치적 의도를 경계하며 현재 진행중인 언론사 세무조사 및 공정거래 조사를 최대한 투명하고 공정하게 시행할 것을 촉구한다. 또한 정부는 대한매일신보와 연합뉴스 등 일부 언론매체의 독립적 위상 확보에 적극 협조할 것을 촉구한다.
6. 일부 보수언론들은 정부의 언론개혁 조치가 언론탄압이라고 비판하고 있으나 그 같은 대정부 비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들 신문이 언론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이들 보수언론들은 근거 없는 소모적 비방전에서 벗어나 다른 언론사와 시민단체, 언론전문가들과 함께 진정한 언론개혁의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대화에 참여할 것을 권고한다.
7. 현재 한국의언론개혁논쟁은 여당과 야당, 신문과 방송, 신문 대 신문, 신문 경영진 대 현장 언론인 등 여러 이해 당사자간에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언론상황에 관심을 가진 국제언론단체들은 일부 이해 당사자가 제공하는 정보들에만 근거한 상황 판단과 논평을 자제하고 보다 종합적이며 균형 잡힌 상황 판단에 노력해줄 것을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