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외무부는 정치부 산하 출입처 중에서 뉴스경쟁이 매우 치열하고 뉴스의 양 역시 많은 곳으로 손꼽혔다.
1945년 8·15 해방을 계기로 신문 지면들은 분야별로 고정화되다시피 했다. 예를 들어 8개면 발행의 경우 1면은 정치, 2면은 사설·인사·동정과 단신들, 3면 국제뉴스, 4면 경제, 5면 문화 및 기획, 6면 서울 및 지방뉴스, 7면 사회, 8면은 스포츠 및 기타 등으로 정리됐다.
이는 8·15 해방으로 갑자기 둑이 터진 정치의 홍수, 정치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특별히 큰 뉴스가 없는 한 톱은 물론 1면의 큼직한 기사들을 정치부가 마련, 공급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고 만 것이다.
물론 국회가 열리거나 각 당이 세력다툼 또는 당권 경쟁으로 진통을 겪으면 1면은 자연스럽게 장식될 수 있었으나 국회가 쉬고 정당이 조용해지면 외무부쪽에 톱기사를 기대하게 되었다. 청와대는 발표와 풀기사가, 중앙청은 1∼3단 정도의 뉴스가 주류여서 외무부 기자들은 때로는 휴가도 잊은 채 뉴스경쟁에 매달려야만 했다. 필자도 언젠가 부장으로부터 “(미안하지만) 휴가를 가려면 톱거리 3∼4건을 만들어 놓고 가라”는 얘기에 눈 딱감고 갔다가는 언제 호출당할지 몰라 연간 3∼5일의 휴가를 반납한 적이 있다.
이즈음 한국외교는 종전까지 미국 일본만을 상대하던 단조로운 패턴에서 탈피, 새로운 도약의 국면을 맞았다. 월남전에 2개 전투사단과 해병부대 등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함에 따라 잇단 정상회담, 외무장관회담 등을 통해 한국방위력 강화를 위한 한·미간의 군사협력 강화, 한·월남간의 긴밀한 협력, 월남참전국간의 관계증진, 한국의 주도로 창설된 아시아태평양각료회의(ASPAC)외교,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에서 북한과 수교경쟁, 매년 유엔에서 통일결의안을 둘러싼 표대결 외교 등으로 한국외교의 폭과 내용이 다양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외교관련 기사가 연일 꼬리를 물고 선보였다. 기자들은 외무부가 발표한 것을 대체로 1∼3단 정도로 처리하고 저마다 경쟁적으로 큼직하고 때로는 거창한 외교기사를 지면에 장식했다. 그런데 기사의 출처는 한결같이 ‘정부 고위당국자’ ‘고위 외교책임자’ ‘정부소식통’ ‘믿을만한 고위 소식통들에 의하면…’을 내세웠고기사내용도 딱부러지게 ‘…할 방침이다’ ‘계획이다’ ‘하기로 했다’가 아니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해졌다’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는 식으로 썼다.
이런 식의 외교기사가 거창하고 요란한 컷과 굵직한 활자제목으로 포장돼 보도되면 정부 당국자는 크게 놀라거나 가슴을 조이며 읽곤했다. 사실 상당수 기사들이 요란하고 화려했지만 구체적인 내용들을 갖추지는 못했던 것이다.
뉴스경쟁에 참여하다 보니 여느 신문이 외교기사를 톱 등으로 크게 실어도 다른 기자들은 별로 놀라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저 “톱으로 올렸나”하는 정도이고 그렇다면 “나도”하며 다음날 외교기사를 톱으로 선보이곤 했다. 한마디로 남의 톱기사에 대해 좀처럼 ‘특종’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시 외무부 기자실의 뜨거운 취재경쟁을 두고 언론계 일부와 외교관들은 진실의 10∼20%만 갖고 마구 써대는 ‘작문경쟁’이라고 까지 혹평했다. 물론 이따금 확인·분석을 거친 탄탄한 외교기사가 ‘진짜 특종’으로 부러움을 샀지만 과열경쟁속에 상당수 기사들은 과잉포장에다 오보까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같은 부실취재, 부실보도에도 불구하고 당시 외무부 기자들은 새 기사를 발굴하려는 열정으로 뉴스경쟁을 벌였고 그로 인해 무조건 덮고 감추는 것이 외교요 국익이라는 고위관계자들의 인식을 바로 잡는데 적지않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외무부 출입 기자들의 면면을 소개한다. 동아(조규하 강인섭 유경현 황선필) 조선(최호 김학준 고 최재호) 한국(이성춘) 경향(정남 이형균 박강지) 대한(조성길 임한순) 중앙(심상기 박석홍 고 허준) 신아(안재환) 서울(이재원) 합동통신(김영일 김상의) 동양통신(이문호 김용범) 동화통신(이청수) KBS(임연택) MBC(김창식 이상욱) TBC(김옥조) DBS(백항기) CBS(김운라) 코리아타임스(조병필) 코리아헤럴드(양윤길)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