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허물만 보고 살아 온 탓인가.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 발표 및 6개 언론에 대한 검찰 고발 이후 언론계는 극심한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도처에서 공격의 칼날이 번득인다. 언론과 정부간에, 여당과 야당간에, 언론과 언론간에 평상심의 궤도를 벗어난 공격의 칼질이 난무한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어야 할 사상 초유의 상황이다. 어찌 보면 한국 언론사의 중대한 분수령일 수도 있다. 생존의 일터인 동시에 존재의 이유였던 소속사가 또는 사주가 검찰에 고발당하는 상황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굳이 ‘기자 총회’라는 이름을 빌지 않더라도 삼삼오오 모인 자리에서는 분노와 탄식이 새어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혼란의 진원지인 언론계 일각에서는 뒤틀린 분노의 광풍마저 일고 있다.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기자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과연 누구를 향한 분노인가.
반성은 얕고, 분노는 넘친다. 모 언론사 기자총회 장에서는 현 상태를 왜적이 밀려오는 임진왜란에 비유하는 발언도 있었다. ‘적’이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일단 막고 봐야 할 것 아니냐는 상황논리다. 어떤 언론사의 기자 모임에서는 순식간에 ‘사주 구속=생존 위기’라는 등식을 성립시키고, 총력투쟁의 강철대오를 다짐했다. 2년 전 “사장님 힘내세요”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킨 한 언론사에서는 사주의 혐의가 입증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정권의 타협에 굴하지 말라”는 격려의 일성이었다는 해괴한 재해석까지 시도하고 있다. “우리는 억울하다”는 반응도 빗발친다.
스스로의 운명과 도덕성을 소속사 또는 사주와 일치시키려는 왜곡된 일체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최루탄 연기 속에서 역사의 준엄한 의미를 수없이 되새겨야 했던 이른바 386세대 중견기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사원인가 기자인가.
언론인으로 첫발을 내디딜 때의 해맑은 초발심(初發心)은 어디로 가고 ‘사원 이데올로기’의 맹목성에 함몰돼 있는가. 물론 희망의 싹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자 사회 일각에서는 ‘지면의 공정성’과 ‘독자의 신뢰’를 우려하는 맑은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성명서 채택을 놓고 긴 시간동안 토론을 거듭하고 있는 동아일보 기자들의 고민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기자사회의 건강성을확인한다.
그러나 아직은 희미하다. 회사의 위기, 사주의 위기에 앞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언론에 대한 신뢰감의 위기이다. 곳곳에서 신뢰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지 않은가. 처음으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