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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 남-북, 중동·아프리카 상대 지지외교 경쟁 치열

그때 그시절  2001.07.0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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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춘 전 한국일보 이사 겸 논설위원>



1967년은 어수선한 한해였다. 밖으로는 한국이 월남에 2개 전투사단을 파견, 월남전에 깊숙이 발을 넣었고 아울러 건설근로자들의 대거 진출로 소위 월남특수·월남붐이 일었다. 안으로는 박 정권이 쉽게 재선한 후 7대 총선을 3·15 부정선거에 버금가는 부정의 잔치로 만들어 원내 3분의 2석을 무리하게 확보, 야당과 국민의 분노를 샀다.

대북관계로는 중앙통신 부사장인 이수근이 판문점을 통해 귀순했고 중앙정보부는 박 대통령 취임식 1주일만에 동백림을 거점으로 하는 북한대남공작단사건(관련자 윤이상씨 등 194명)을 발표해 놀라게 했다. 인구는 남한 전체가 3000여만명으로 서울은 400여만명이었고 건국이래 외환보유고가 처음으로 3억달러를 넘었다고 정부가 크게 발표하던 때였다.

당시 한국외교는 유엔외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농부가 한해동안 농사를 지어 가을에 수확하듯 남·북한은 1년 내내 아시아·중동·아프리카를 상대로 치열한 지지외교를 벌인 뒤 매년 늦가을 유엔정치위원회에서 각각 제안한 한반도 통일 결의안의 지지표수를 그해의 외교성적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외무부는 장관급 검은 손님들을 잇따라 초청해 산업시찰, 훈장수여, 요정에서의 환대 등을 했는데 여기에 재미를 붙인 일부 인사들은 해마다 찾아와 거드름을 피웠다. 당시 아프리카 모국의 장관은 울산지역 공단 시찰중 “이런 공장 하나 지어주면 장차 20년 이상 확고하게 한국을 지지하겠다”고 말해 안내자를 당혹케 했다.

초청외교와 함께 한표를 건지기 위한 장·차관의 후진국 순방이 있었는데 방문국 고위층에게 선물과 금일봉을 돌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한국의 농업기술자·의료진이 아프리카에 파견된 것도 유엔외교의 일환이었다. 형편이 어려운 북한도 남쪽에 뒤질세라 초청과 방문외교, 선물공세를 펼쳤다. 이같은 경쟁은 동·서독, 중국과 대만등 분단국들이 비슷했는데 중국은 주은래 수상이 아프리카를 수시로 돌며 일부 철도까지 부설해주는 등 적극 공세를 폈다.

남·북한이 아프리카·중동지역 국가들을 상대로 수교경쟁을 본격화하자 언론과 청와대, 중앙정보부 간에는 국가이익(National Interests) 논쟁이 벌어졌다. 언론은 국민의 알권리 충족과 장차 국민외교의 기반 구축을 위해 수교 등 외교교섭 상황과 합의사실 등을 수시로 보도하는 것이 국익을 신장하는길이라고 주장한 반면 정보부 등은 교섭과정이 보도되면 북한이 적극적인 방해와 모략활동을 벌여 자칫 외교가 물거품이 돼 결국 국익을 저해하게 된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여러명의 기자들이 청와대와 정보부로부터 경고 또는 조사를 받았다.

필자도 “정부, 카메룬과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 곧 상주대사 파견” 기사를 취재, 1면 톱으로 올렸다. 다음날부터 정보부 등으로부터 “외무부의 발설자를 대지 않으면 불러다 대접 좀 해야겠다”는 경고를 받는 등 시달려야 했다.

얼마뒤 정보부는 외무부 기자들을 이문동 청사로 초청, 북한정세에 대한 브리핑을 한 후 외교기사와 관련, 간담회를 가졌다. 훗날 남북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Q국장은 “최근 보도한 카메룬과의 수교합의는 외무부의 극비문서 캐비닛을 부수지 않고는 입수할 수 없는 정보인데…. 보도가 나가자 북한은 이를 뒤엎으려고 카메룬측에 엄청난 물량공세를 펴고있다”, “당신들은 국민을 위한 보도라지만 그것은 반국가적인 이적행위다”라며 화를 냈다.

필자는 “수교가 완전히 합의된 것이고, 보도가 됨으로써 북한이 더 이상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망설이는 이웃국가에게도 친한국쪽으로 확신을 갖게 할 수 있지 않은가. 내 나름대로 심사숙고 끝에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아래 쓴 것”이라고 해명했는데 Q국장은 “당신, 조심해야겠어”라며 얼굴을 붉혔다.

사실 보도와 관련한 국익의 한계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국익은 정부만이 지킬수 있는 고유 영역과 대상이 아니다. 이성적 판단에 의한 언론보도 역시 국가이익을 위한 노력이요 행위라는 필자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무튼 당시 북한과 관련한 보도가 나갈 때마다 청와대 등 힘있는 기관은 외무부를 닦달했고 담당기자는 여러 형태로 시달려야 했다. 약이 오른 기자들이 혹시 외무부가 취재활동을 억제하려고 당국에 “적당한 제재를 요청한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했고, 어느날 차관실에 몰려가 “귀하가 연락한 것 아닌가”라고 따졌다.

독일병정이란 별명을 지닌 K차관은 한동안 기자들의 화풀이성 항의를 들은 뒤 “나는 애지중지하는 셰퍼드를 잃어버렸어도 파출소에 신고하지 않은 사람이다”라고 대답한 후 눈을 감았다. 기세가 꺾인 기자들은 소리없이 차관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