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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 '미 특사 방한' 정보 확인차 한밤에 중앙청 월장

최규하`장관`"어디서`들었나"`따져`묻기만

이성춘  2001.07.14 11: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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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사건으로`첫`해외출장`‘물거품’돼





1968년은 북한의 무모한 잇단 무력도발로 인해 나라 전체가 긴장과 격동으로 어수선한 한해였다. 이에 따라 정치부 사회부 외신부 기자들은 각 분야에서 바쁘게 움직였고 특히 외무부 출입기자들은 1년 내내 뉴스경쟁에 매달려야 했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잊을 수 없는 한해였다. 이해 연초 필자는 1월 26일부터 뉴델리에서 열리는 유엔통상회의(UNCTAD) 총회를 취재하라는 출장명령을 갑자기 받았다. 필자는 첫 출장명령을 받고 기대에 부풀었다. 거의 매일 사내외 기자들에게 무교동 대포집 등에서 출장턱을 냈다.

1월 21일 일요일. 25일 출국예정인 필자는 이날 일요당직을 앞당겨 근무하며 해설자료를 정리했고 저녁에는 일요국장과 재동에 있는 고 홍유선 편집국장 댁에서 저녁을 먹으며 휴전 직후 선배 언론인들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밤 9시가 넘어 멀지않은 곳에서 ‘뚜르르 뚜르르’하는 6·25때 귀에 익은 기관총소리, 콩 볶는 듯한 소리가 4∼5차례 들렸으나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통금이 가까워 일어서려는 순간 신문사에서 긴급전화가 걸려왔다. 청와대 부근에 수십명의 무장괴한이 출현, 경찰과 교전 끝에 여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군까지 출동, 계속 교전중이라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저녁 체포된 김신조가 TV 생중계에서 “박정희의 목을 따러왔다”라고 했을 때 정부와 국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북한 특수부대인 124군 소속 31명의 무장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남파, 잠입했다가 청운동 길에서 저지하는 최규식 종로서장 등과 교전, 최 서장을 사살하고 흩어졌으나 김신조만 생포되고 대부분은 사살됐으며 몇몇은 휴전선을 넘어 귀환, 북에서 영웅적 환영을 받았다.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한 저들의 대담하고 무모한 도발에 모두가 놀라는 동안 이틀 후인 23일에는 원산부근 공해에서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에 강제납치되어 한반도는 전세계의 뉴스 초점이 됐다. 처음 김신조 사건이 터졌을 대 관망하던 미국은 푸에블로호가 납치되자 주한미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동해에 항공모함을 파견하는 등 승무원과 정보함 구출을 위해 부산하게 움직였다.

아무튼 두가지 돌발사건으로 필자의 첫 해외취재 뉴델리출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북한의 엄청난 도발로 북한에 대한 국민의 분노와 적대감, 경계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외무부는 대미안보협력의 구체화와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북한도발에 대한 규탄외교에 나섰다. 두 사건이 있은지 20여일후 필자는 미국이 한국의 안보강화를 위해 고위급 특사를 파견한다는 뉴스를 특종보도했다.

필자는 미국이 곧 누군가를 보낸다는 귀띔을 받고 일단 기자들과 중앙청에서 나왔다가 밤에 담을 넘어들어가 최규하 외무장관을 면담했다. 고위인사의 이름과 방한일정을 물었으나 별명이 ‘쇠자물통’인 최 장관은 딱 잡아뗀 뒤 어디서 들었는가 하며 따지는 것이 아닌가. 결국 다음날 존슨 대통령의 특사가 빠르면 내주에 올 것이라고 보도했는데 얼마후 사이런스 밴스 전육군장관이 특사로 내한, 박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한 후 장충동 앰버서더호텔에서 최 장관과 대한 긴급군사원조에 대해 철야협상을 벌였다.

기자들도 새벽 2∼3시까지 스트레이트와 스케치기사를 잇달아 보냈다. 다음날 새벽 미국의 1억달러 무상군원과 안보강화 약속으로 회담은 끝났다. 새벽 경쟁신문을 보니 1,2,3면을 회담기사로 도배하다시피 한 반면 한국일보는 1면에 4단, 3면에 손바닥만한 박스가 고작이었다. 무책임한 야간 데스크가 ‘별 것 아니다’라는 엉뚱한 고집으로 산더미같이 보낸 기사를 죽인 것이다. 문제의 데스크는 회사 고위층으로부터 엄한 질책을 받았지만, 어찌나 화가 나던지….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미국이 서둘러 특사를 파견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미국이 자신을 죽이려는 김신조 사건때는 침묵하다가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지자 그쪽에만 관심을 쏟는데 분노했고, 일각에서는 휴전선 진지나 서해안 포대 공격 또는 평양의 김일성 관저를 기습하자는 보복론이 고개를 들어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되지 않을까, 특히 한국이 안보를 이유로 월남에서 전투사단을 철수하지 않을까 우려해서 한국을 달래려 1억달러 군원을 약속했던 것이다.

두 사건 외에 7월에는 임자도거점 대규모 간첩사건이, 8월에는 통일혁명당 지하간첩단 사건이 적발됐고 11월에는 북한이 울진·삼척지구에 200∼300명으로 추정되는 무장간첩단을 보내 군이 대대적인 색출작전에 나서는 등 북한의 대남도발은 절정을 이루었다.

이런 이유로 1년 내내 외무부 기자들은 ‘정부고위층’ ‘정통한 소식통’ ‘고위당국자’등을 빌어 안보와 외교강화 등에 관해 숱하게 써대는 기사경쟁을 벌였다. 연말 판문점에서 잇단 군사정전위 회의 끝에주한미군 사령관 명의의 사과문을 건넴으로써 푸에블로호 승무원 82명이 336일만에 판문점을 통해 송환돼 1968년의 대미를 장식했다. 송환협상 매듭기사는 D일보가 특종을 했는데 미국이 외무부에 극비리에 통보해 온 것을 당시 C모 간부가 생색을 내려 D일보에 흘린 것으로 알려져 장본인은 청와대와 기자단으로부터 한동안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전 한국일보 이사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