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206회 임시국회는 방송정책행정권을 통합방송위원회에 이관하는 것을 골자로 한 방송 개정안을 끝내 처리하지 못하고 폐회했다.
노정 합의가 이뤄진 후 엉뚱하게 나타난 복병, 'KBS 경영위원회 도입' 문제를 두고 여야가 충돌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남은 정기국회는 내년 총선을 겨냥한 정치국회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아 올해 내 통과전망은 더 어두워졌다.
노정합의등 성과 많아
그러나 언론노련 최문순 위원장은 "또 밀고 나가면 된다"는 자신감을 나타냈다. 노사 간 여야 간 논란은 이제 다 정리된 상태라는 것이다. 최 위원장은 "방송법 개혁이 개혁-보수진영 간 힘 겨루기의 최전선에 있는 만큼 역사적 의무감으로 관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록 '미완의 개혁'으로 남긴 했지만 이 과정에서 방송노조와 시민단체들은 개혁운동의 일대전기를 마련했다. 파업과 여론화 작업으로 방송 독립의 원칙과 방법에 대한 노정 합의, 여야 합의를 끌어낸 것이다. 이것은 정권 내 보수세력에 확실한 압박으로 작용해 방송정책행정권을 그대로 정부에 존치시키려는 '막판 뒤집기' 움직임에 쐐기를 박을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다. 노정이 합의한 방송법안은 인권법 등 여타의 개혁법안의 모델이 됐다. TV시청료 거부운동, MBC와 KBS의 방송민주화선언과 경영진 퇴진운동 등 그동안 정권의 개입에 대한 저지와 거부에 머물던 개혁운동의 차원은 정치행위에 참여하는 수준으로 한 단계 높아졌다. '정치권력에로의 자유'를 향한 첫 걸음이라고 할 만하다.
한편으로 개혁진영은 또 하나의 장벽에 부딪혔다. 개혁진영 내 균열이 가속화된 것이다. 사방에는 개혁세력의 사상자가 즐비했다. 대통령 직속 방송개혁위원회에 참여했던 개혁적 언론학자들은 졸지에 '정권의 방송장악음모'에 가담한 공모자로 낙인찍혔다. 방송노조 집행부는 노정 합의과정과 결과에 반발한 내부 조합원들로부터 심한 질타를 받았고 심지어 '불법파업'을 이유로 구속되기까지 했다.
노조파업에 동참하지 않는 일부 시민운동가는 '여당 2중대'란 비난에 멍들었다. 여당 안에서 동분서주한 소수 개혁세력은 정권 내부의 반발과 외부의 공격에 기진맥진했다. 오히려 보수진영은 이 사안에는 노조세력, 저 사안에는 방송사 경영진의 손을 들어주며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원인은 개혁세력 내부의 한계에 있었다.특히시민여론은 방송종사자들에게 가혹했다. 여론은 방송노조가 파업 중에 자사 관련 문제를 일절 거론하지 않았는데도 '자사이기주의' 운운하며 의외의 냉담함을 보였다. 'KBS 사원 임금이 공무원들의 10배' 식의 비대칭적 비교에 예상 외로 흥분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평소엔 권력과 한편 아니었냐', '너희는 기득권자 아니냐'는 질타가 작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 방송개혁위원회 실행위원으로 참여했던 김승수 교수는 방송노조가 방송개혁을 추진하더라도 방송종사자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선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사실 이것은 근본적 한계다. 한 노조 간부는 "노조가 자사 이기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정당이 당리당략을 추구한다는 비판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즉 사회집단의 기본성격을 무시한 몰상식한 비난이라는 것이다. 조합원을 세력의 근본으로 하는 노조는 당연히 조합원의 뜻과 이익에 거스르는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없다.
이번 노정 합의가 현실적으로 얻어낼 수 있는 부분은 거의 다 얻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노조 집행부가 조합원들로부터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이 없었다',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했다'며 공세를 받은 원인도 여기 있다.
방송사 내 개혁이 소수에 의해 가끔 진행된다는 한계도 있다. 5, 6년 간 노조운동에 꾸준히 참여해온 한 기자는 "방송사 내 개혁세력이 너무 소수"라고 말했다. 방송파업 중의 '노동자'는 파업이 끝난 후엔 급속히 '언론권력자'로 회귀한다. 문제의식은 소수 운동가에게만 이어진다.
이젠 '평소 실력' 쌓을 때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인물과 사상 7월호에서 "평소엔 팔짱 끼고 구경만 하다가 무슨 일이 닥쳐야만 결사항전을 부르짖는 노조의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방송법이 노조의 뜻대로 된다 한들 한국 방송이 과연 지금 노조가 내세우는 바와 같은 명분에 충실한 것인지 지극히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내부조직부터 개혁하라고, 방송인으로서 최소한의 직업적 자존심을 지키라고, '평소실력'을 쌓으라고 비판했다. 9년 전 '한국방송민주화운동사'에서 "방송언론이 정부여당에 의해 장악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방송노조의 치열한 투쟁 덕분"이라고 평가했던 그였다.
KBS 지회는 옷 로비 의혹, 조폐공사 파업유도 의혹 보도 때 공방위에서 문제를지적하려고조사를 벌였으나 결가 나온 후 난감함에 빠졌다. 간부들이 아이템을 누락시킨 게 아니라 기자들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은 것이다.
문제의식의 망각은 권력에의 복종이다.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방송의 독립'이란 50년 묵은 숙원을 풀고 개혁의 주체로 설 것인가 새로운 개혁의 대상으로 타깃이 될 것인가. 이젠 방송노조가 아니라 방송언론인 개개인의 선택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