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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 남-북 수교경쟁으로 해외공관 급증…사건도 늘어

에티오피아 주재 대사관서 현지 여직원과 스캔들

이성춘  2001.08.04 11: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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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보상금·직원 전원 교체로 사건 무마시켜





1960년대 남북한은 유엔에서의 표 대결을 위해 아프리카 중동지역의 신생국들과 수교경쟁, 공관신설경쟁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이즈음 월남에 전투병력과 건설인력이 대거 파견되면서 우리 국민들은 세계각지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공관이 늘어나면서 각종 사고가 심심치 않게 꼬리를 물고 발생했다. 공관에서 발생한 사고는 공관장 및 외무부 소속 직원과 정보부 요원들과의 불화, 일부 공관장의 외교활동비 유용·착복, 유력 교민들과의 불미스러운 밀착, 공관 여직원과의 스캔들이 주종을 이뤘다. 남미 2공관에서는 부인들이 보는 앞에서 대사와 1등 서기관이 멱살잡이를 해 한때 요란한 화제가 됐었다.

동남아 모국 주재 대사는 교민회장과 골프를 치다가 공으로 얼굴을 맞혀 중상을 입혔고 출중한 외국어 실력으로 장관감으로 꼽혔던 K씨는 대사관저에서 일하는 한국여인의 유혹으로 3류지역만 떠돌며 근무해야 했다.

유신때인 1970년대 초에는 유럽주재 일부 공관장들이 활동비를 유용하고 그 책임을 말단 외교관에게 덮어 씌우자 호소할 길이 막힌 외교관 몇몇이 스위스·덴마크 정부에 망명을 신청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비리를 저지른 장본인들은 버젓이 귀국해 편안한 여생을 지냈고, 촉망받던 젊은 외교관들은 10여년간 현지에서 비참한 망명객 생활을 해야만 했다.

1960년대 후반 에티오피아 주재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는 현지 묘령의 여직원이 임신, 대사관측에 책임을 지라고 항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서울과 그곳 수도 아디스아바바와는 직통전화도 없어서 파리 공관을 거쳐 간접통화를 하던 시절이었는데 사태는 점점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정보였다.

에티오피아는 6·25때 대대단위의 전투병력을 보내 공산침략에 용감하게 맞서 싸웠던, 우리에게는 잊을수 없는 고마운 나라였다. 특히 몇달 전에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박 대통령 초청으로 한국을 다녀가지 않았는가?

필자는 황제가 방한했을 때 아프리카의 역사를 뒤져 해설기사에서 “기원전 북부아프리카 일대를 석권했던 악튬제국시대 시바여왕의 예지를 이어받은 셀라시에 황제…”라고 썼다. 지금도 춘천에 갈 때면 당시 황제를 취재하던 일을 떠올리곤 한다. 코스모스가 흔들리는 경춘가도를 달려 춘천호반에서 에티오피아 참전비를 제막할 때 황제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5척 단구의깡마른 70대의 노황제지만 형형한 눈빛과 위엄은 주위를 압도했다. 1930년대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자 황제는 제네바에 있는 국제연맹으로 달려가 침략군을 물리쳐달라고 눈물로 호소해 각국 대표들을 감동시켰고 국민들로부터 가히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6·25 참전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황제를 초청, 참전비까지 제막해 양국간의 우의를 돈독히 했고, 그러한 때에 그같은 스캔들이 빚어지자 무척 당황했다. 먼저 정보를 입수한 청와대는 즉각 진상조사에 착수, 범인을(?) 엄단하라고 지시했다.

외무부는 우선 파리대사관을 통해 조사한 결과 대사 등 공관원 각자가 자신은 무관하다며 상대방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 또 희한한 것은 여직원이 문제의 한국직원 거명에 일체 함구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속이 탄 외무부는 우선 S 1등서기관을 서울로 소환, 조사했으나 그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펄쩍 뛰었다. 다음에는 종교인 출신의 Q현지대사를 소환했다.

Q대사가 ‘정부협의차 귀국’하는 날 공항 귀빈실은 기자들로 붐볐다. 그가 들어서자 질문이 쏟아졌다. “대사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누구의 소행입니까” 이에 Q대사는 “나도 모르는 일입니다” “내가 어떻게 압니까?”라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때 한 기자가 “그렇다면 대사님은 했습니까, 안했습니까”라고 묻자 드디어 그가 폭발했다. “뭐야, 내가 뭘 했다는 거야. 난 한적 없다고…”라며 화를 낸 뒤 자리를 떴다. 그 뒤 한동안 기자들 사이에는 “했는가, 안했는가, 누가 했는가.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지금 같으면 유전자 감식으로 당장 판명이 되겠지만 외무부는 범인색출에 실패했다. 나라 망신이어서 기자들은 일체 기사화하지 않았지만 외무부에는 “그 여성을 파리나 서울로 불러 살살 달래면 애기 아빠가 누구인지를 실토할 것”이라고 비책을 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 뒤 당국은 가족들에게 약간의 보상금을 주어 해고와 함께 무마시켰고 몇달 뒤 대사 등 직원들을 차례로 교체시킴으로서 사건은 오리무중 속으로 사라졌다.

Q대사는 외무부를 떠나 종교계에 복귀, 활동하다가 수년전 작고했고 은퇴한 당시 직원들은 지금도 ‘진상’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 필자를 궁금하게 하고 있다.

<전 한국일보 이사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