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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지방출장서 국군 전력 증강계획 단독보도

연락처 없이 사라진 청와대 출입 선배들

이성춘  2001.08.25 11: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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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곳에서 술 마시다 ‘낙종’





1960년대 중앙청과 외무부를 출입하면서 국회, 정당, 청와대도 겹치기로 자주 출입했고 청와대는 대통령이 지방에 갈 때 출입기자 대신 수행취재를 했다.

당시 청와대 기자실은 대변인이 발표하는 대통령의 담화와 성명, 배경 브리핑, 동정, 그리고 각종 회의, 의식과 시찰때 기자들이 교대로 취재공급하는 풀(pool)기사 외에는 단 한줄도 개별취재나 보도를 할 수 없었다. 독자적으로 썼다가는 제명 또는 출입정지였다. 그래서 기자라기 보다는 ‘청와대 파견 대사’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토록 엄격한 공동보도의 분위기에서 필자는 뜻밖의 특종을 건져 기자실을 뒤흔들었다. 지방으로 출장을 갈 경우 대통령의 행사가 끝나면 선배기자들은 필자에게 “마음대로 먹고 마시라”며 호텔에 남겨두고 자기들끼리 ‘재미있는 곳’에 가서 즐기다(?) 자정께 돌아오곤 했다. 필자가 3∼5년 후배인데다 임시 출입이어서 동행하기가 껄끄러웠던 것 같다.

1969년 10월 하순 대구공군기지에서 팬텀기 대대가 처음 창설돼 취재차 내려갔다. 그날 저녁도 출입기자들은 즐거운 기분으로 어딘가로 이동했고, 필자는 밤 10시가 넘어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두어 시간 잤을까. “기자들 어디있어?”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방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강상욱 청와대 대변인(전 최고위원·국회의원)이 방에 들어섰다. “당신만 있구만…. 기자들에게 연락할 수 없겠어?” 시계를 보니 0시40분께였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큰 기사가 나왔는데…. 기자들이 없어서 큰일났다”는 것이다.

속이 탄 강 대변인이 “한국일보만이라도 실어달라”며 브리핑을 하려는 것을 필자는 “나만 쓴다는 것은 풀기사 제도를 어기는 것이므로 안된다”며 ‘기자단의 원칙’을 강조했다. 필자가 대신 “경북도경 국장과 대구서장, 정보부 지부 등을 통해 기자들이 갈만한 곳을 수배해 보라”고 권유하자 그는 이들에게 “빨리 찾아달라”고 당부했으나 20∼30분 후 회신은 ‘확인불능’이었다. “이 기자! 당신도 봤지. 이렇게 찾아도 안되니 할 수 없지 않은가” 필자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경위는 이러했다. 청와대 습격 사건 후 국방태세 강화에 전력해온 박 대통령은 미국의 지원으로 당시 월남전서 맹위를 떨치던 팬텀기 대대를 창설한 데 기분이 좋아지자 이날 저녁 숙소인 수성관광호텔에서 이지역 기관장들과 회식을 하며 장차 북한의 도발에 대비한 국군 전력증강 계획을, 훗날 율곡사업의 골격을 비교적 소상하게 토로했다(모두 군사비밀사항). 그는 회식이 끝난 뒤 기자들에게 그대로 전해 크게 보도하게 하라고 지시했고 특명을 받은 강 대변인은 호텔로 달려왔던 것이다.

30여분간 메모를 한뒤 본사 편집국에 전화하자 야간국장은 “새 뉴스가 없었는데 한번 불러보라”고 했다. 기사를 부른뒤 다시 잠에 빠졌는데 “야! 취하는데…” “한잔 더하자” 라며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 3시 반께 기자들이 돌아온 것이다. 경쟁지의 Q선배가 문을 두드렸다. “동생, 별일 없었지?”라는 그에게 “이런 게 있었다”면서 원고를 건넸다. 원고를 읽던 Q선배가 갑자기 ‘억!’하면서 “이봐 동생, 이거 몇시에 얼마나 길게 보냈어?”라며 외치듯 물었다. 그대로 설명하자 그는 “이거 큰일났는데…”를 연발하며 안절부절했다. Q선배는 그 자리에서 본사로 전화를 걸어 ‘특보’를 보내겠다고 했으나 “20∼30분 뒤면 인쇄가 모두 완료된다”는 대답에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놨다.

아침에 식당에 가니 기자들은 한쪽에 모여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강 대변인을 불러 “왜 그런 기사를 한국일보만 줬는가”라고 따졌으나 다혈질인 대변인은 “도대체 어디를 가더라도 연락처를 남겼어야 하지 않은가. 어젯밤 이 기자와 내가 경찰을 동원, 아무리 찾아도 연락이 안돼 내가 사정 끝에 기사가 실린 것이다. 당신네들 뭐가 잘했다는 것이냐?”고 반박했다는 것이다.

서울역에 도착해 신문을 보니 필자가 부른 기사가 1면의 3분의 2를 뒤덮었고 마치 박 대통령을 단독 인터뷰한 것처럼 지면을 꾸몄다. 회사에 들어가자 모두들 “수고했다”며 격려했다. 반면 Q선배는 발행인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고 다른 기자들도 단단히 기압을 받았다는 뒷 얘기다. 10여일 뒤 대리출장을 위해 청와대 기자실에 가니 선배들의 눈초리가 따가왔다.

다만 Q선배는 특종소동후 청와대 출입에서 정치부 내근을 하게 되었고 몇달 뒤에는 청와대 비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필자는 그런 변화가 혹시 낙종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미안한감을 한동안 지울수 없었다.

<전 한국일보 이사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