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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 계엄령으로 보도 제한받자 가십으로 기사화

이성춘 전 한국 이사  2001.09.15 1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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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외교통상부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외무부가 점차 틀을 잡고 외교업무를 주관하게 된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건국후 1950년대에는 경무대-이승만 대통령이 외교업무에서부터 외교관들의 해외출장과 달러업무까지 관장했고 외무부는 부속실이나 다름없었다. 장면 정권때 정치인 출신인 정일형 장관(정대철 의원 부친)이 외교의 틀을 잡으려고 계획하는 도중 5·16쿠데타로 무산되고 말았다.

1960년대는 한일협정을 위한 교섭, 월남파병에 따른 한국군 근대화를 위한 브라운각서 협상, 한미행정협정교섭, 한반도 통일안을 둘러싼 유엔에서의 남북간 표대결 그리고 수출증진외교, ASPAC(아시아·태평양협의회)을 통한 동남아 외교 등으로 한국외교가 서서히 경험과 내실을 축적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외교를 이끈 선구자들 중 특1세대는 누가 뭐라해도 이승만 대통령이었고, 제1세대는 차례로 외무장관을 지낸 변영태(전 국무총리) 임병직(전 유엔대사) 조정환씨 등이고 제2세대가 최규하 김용식 김동조 전 장관 등이었다. 성격과 취향, 외교스타일, 부하관리방식 등이 저마다 다른 제2세대 3인은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으로 늘 출입기자들의 추적의 대상이었다. 3인중 외무부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이는 김용식 씨이고 차관은 김동조 최규하 김용식 순으로, 장관은 김용식 최규하 김동조 순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이들은 기자들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 최씨는 업무에 관해서는 철저히 함구해 별명이 최뚝심·돼지족발(손이 퉁퉁하다 해서)이었고, YS로 불리운 김용식씨는 말은 자세히 하나 듣고보면 알맹이가 없었다. DJ 라는 별명으로 많은 고시출신들을 직계로 거느린(?) 김동조씨는 이따금 시원시원하게 핵심을 얘기하지만 사뭇 정치적이기도 했다.

언젠가 작고한 이범석 전 장관이 기자들과의 회식자리에서 3인의 성격을 표현하는 비유를 해보라고 제안했을때 필자의 안이 1등(?)을 한 적이 있다. 내용인즉 길에 만원짜리가 떨어졌을때 최 장관은 행여나 못볼 것을 본 듯 고개를 돌리고 지나가고, 김용식 장관은 일단 몇발자국 지나치다 “이게 뭡니까”하며 집어들고, 김동조 장관은 보는 즉시 집어간다고 한 것이다.

이 비유는 외무부 안에 차츰 퍼져나갔고, 필자가 주간한국에 쓴 글중에 슬쩍 넣었다가 3인으로부터 저마다 “모욕을 당했다”며 항의를 받기도 했다. 아무튼 3인은 여러 장단점이 있었으나 우리외교를발전시킨 유공자들이다. 다음 제3세대가 윤석헌 박동진 장재용씨 등이고 제4세대가 노신영 김정태 윤하정 정도순씨 등으로 기자들과 취재 관계로 때로는 숨박꼭질, 입씨름, 설전 등을 했던 인사들이다.

가십은 험담 쑥덕공론 뜬소문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실 이를 기사화하는 것은 언론의 정도가 아니다.

1950년대 가십중 가장 독보적인 것은 동아일보의 백광하 기자(후일 정치부장과 편집부국장 역임·작고)가 쓰는 단상단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여야 지도자, 각계 원로, 신인 누구든 씨자 대신 ○○군이란 호칭을 붙이고 매 꼭지마다 한시 한수씩을 곁들여 풍자비유해 독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정치가십은 5·16후 군정기간중 유달리 성행했다. 계엄령하에서 신문검열로 이것저것 마음대로 쓰지 못하자 슬쩍 가십으로 변형시켜 기사화했고 거의 매일 또는 주 1∼2회씩 20자 원고지 4∼5매, 또는 10∼12매 규모로 나가는 가십에 점차 독자들의 관심이 모아졌던 것이다.

외무부 관계 가십도 단골로 등장했다. 대외교섭 내용을 지나치게 감추거나 기자들을 기피하는 부서, 그리고 여권발급을 지연시킬 경우 장·차관 이하 직원들을 직무태만과 유기, 무소신 등으로 표현해 ‘자극효과’를 올리기도 했다.

수재로 소문난 D과의 신모 과장(후일 외무차관)은 퇴근 무렵이면 이따금 직원들에게 카드를 돌려 적은 패를 잡은 2명이 소주 한잔 사는 것을 관례화했다. 그런데 같은 과를 상대로 좀처럼 취재를 성사시키지 못하던 K신문의 P기자가 어느날 “D과 매일 하오 문 잠그고 포커놀음”이란 가십을 써 크게 문제가 됐다. 마침 박 대통령이 공무원들의 기강을 강조한 직후였고 이에 대통령은 노발대발, 조사후 관련자 전원을 파면토록 최규하 장관에게 지시했다.

문제가 커지면서 청와대 경호실에서 직접 조사를 나왔다. 신 과장 등이 아무리 사정을 설명해도 막무가내였고 P기자 역시 ‘포커게임’을 고집해 신 과장 등 몇몇 직원들의 목은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결국 기자단이 나서서 아까운 인재를 죽일 수 없다고 장관과 청와대측에 호소, 경고로 겨우 수습이 되었다. 가십이 엉뚱하게 위력을 발휘한 예였다.

<이성춘 전 한국일보 이사 겸 논설위원>





‘그때 그시절’중앙청-외무부편은 이것으로 끝냅니다. 훗날 기회가 있으면 1960~70년대 정당·국회 기자실을 연재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