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테러 참사가 일어난 다음날인 12일, 환경운동연합, 민주노동당 등 사회단체와 일부 진보정당에서는 테러에 대한 규탄과 함께 미국 패권주의 전략의 수정, 보복공격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언론은 ‘아직은 스트레이트 분위기’라며 이후에도 한참을 현장 중계와 보복 일정 관측에 열을 올렸다. 서구, 특히 미국 중심의 시각과 사고가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언론이 뭔가 더디가고 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한창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아랍권을 비롯한 제3세계는 우리 언론에게 무엇인가. 언론의 문제와 고민을 짚어본다.
“우리는 보스니아 사태나 중앙아시아의 민족분쟁을 역사의 문맥과 지정학적인 맥락에서 독자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가, 그리고 국제뉴스를 한국과의 관련하에서 보도하고 국내뉴스를 국제적인 연관 속에서 보도할 의식의 틀과 지적 능력을 갖고 있는지가 문제다.”
지난해 10월 발간된 ‘한국언론 2000년위원회 보고서’에서 국제뉴스보도의 개선 필요성을 언급한 대목이다. 국제뉴스 전반의 품질과 함께 국내 언론의 제3세계에 대한 취약한 보도와 인식을 아울러 거론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2000년위원회의 평가는 인색했다. “국제뉴스가 갖는 중요도에 비해 관심을 덜 갖고, 취재망이 약하고, 기자의 안목과 자질이 떨어져 기사의 질이 낮고 양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기자의 자질, 기사의 질에 대한 평가를 차치하고서라도, 그 양상은 지금도 비슷해 보인다.
테러참사 이후 미국의 보복에 초점이 모아진 요즘, 언론은 탈레반을 비롯한 아랍권 움직임에 좀체 시선을 두지 못하고 있다.
한 신문사 국제부 차장은 “이번 테러 사건의 경우 어떻게든 아랍권의 반응이나 입장을 넣어보려고 노력했다”면서 “아직은 ‘상식선’에서 만들 수밖에 없다. 전문성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또다른 한 기자는 “어차피 2차 자료 가지고 보도하는 것 아니냐”며 “질을 따지기엔 역부족이고, 최소한 양적으로라도 균형적인 보도를 하려고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양상이 빚어지는 것은 평소 관심이 없거나 전문지식이 없어서다. 기자들은 “헐리우드 배우의 결혼 소식이 제3세계 움직임 보다 더 큰 대접을 받아온 게 사실 아니냐”고 꼬집는다. 앞서 2000년위원회는 “지금까지 우리 신문의 국제뉴스보도는 서방 강대국 통신사들이 그들의 국가이익의입장에서 보도하는 통신기사를 번역해 싣는 것이 전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 결과 세계에 대한 인식의 틀은 서방 강대국의 관점을 그대로 수용해 우리의 이해관계에서 세계의 흐름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일례로 카인즈에서 95년부터 올 8월까지 ‘아랍&이슬람’을 검색해보면 10개 종합지에 2445건의 기사가 뜬다. 반면 미 테러 사건이 터진 9월 기사건수는 455건이었다. 이미 1년 평균 기사량을 훌쩍 넘어버렸다. 아랍권을 비롯한 제3세계는 그나마 사건이 터져야 국내언론에 조명될 기회가 생기는 셈이다. 물론 현실논리도 있다.
언론이 특별한 ‘거리’ 없이 기사를 쓸 수 있겠냐는 반문이다. 한 기자는 “아프리카, 동남아 전문기자를 5년동안 키운다고 치면, 그동안 그 기자를 몇번이나 활용할 수 있겠는가”라며 “실질적인 투입과 산출 논리나 기자의 장래를 고려해도 쉽지 않은 문제”라고 말했다.
이같은 고민은 국제문제를 바라보는 언론의 기본 시각과 인력 등 근무여건 등에서 비롯된다. 기자들은 특히 서구, 미국 일변도의 시각 교정이 단순히 특파원 증원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지적한다. 한 언론사 차장은 “하다못해 기자연수나 유학도 미국 일변도이다. 관심사가 편중되어 있기도 하지만 언론사 입장에서도 갔다오면 당장 활용 가능하다는 이해에 기인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회사 차원의 지원이 없는, 기자 개인의 관심만으론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연합뉴스의 한 기자는 “미 테러사건의 경우 아랍권 등 제3세계의 시각을 전할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면서도 “AP, AFP, DPA, 이타르타스 등 주요 통신사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사를 소화하는 것만도 벅찬 실정”이라고 전했다. 이란, 이라크 통신발 기사도 들어오지만 현재 인력으로는 이를 챙길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서구 중심의 사고와 시각이 사회 전반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이러한 양상을 확대 재생산하는 언론의 책임은 남기 때문이다.
이상호 한국일보 논설위원은 “제3세계 특히 아랍문제에 대해서는 언론이 이들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주요 서방 매체들의 정보를 받아왔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편향된 관점이 쌓여져 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위원은 “이 때문에 정작 사건이 터지면 전반을 종합하고분석·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 신문사 국제부 기자는 “제3세계에 대한 상시적인 보도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관련 사건이 터졌을 때, ‘소수’가 아닌 ‘다른 나라의 다른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자들은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기적으로는 전문기자 양성이나 제3세계 관련 연수 프로그램 마련, 사내 포럼을 통한 자체역량 축적 등을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의 박인규 편집국장은 “굳이 시각교정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국제보도는 기자 본연의 전문성과도 직결되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박 국장은 “역량이 안된다면 있는 그대로 쓰는 게 최선”이라며 “미 테러 사건을 보더라도 외신기사의 정확성, 신뢰성 등을 판단할 전문성이 갖춰져 있다면 객관적인 보도에 보다 충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