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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방북취재 48년 남북대표자회의"

[인터뷰]설국환 당시 합동통신 편집부장

김상철 기자  2001.10.13 11: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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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위원장과 역사적 회견…한설야씨 회담뒤 ‘비보도’ 요청



북한 대동강변에는 ‘쑥섬혁명사적지’가 조성돼 있다. 지난 48년 4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했던 김구, 김규식 선생을 비롯한 남측 인사들과 김일성 위원장, 김두봉 선생 등 북측 인사들이 대동강 쑥섬에서 회의를 가진 것을 기념한 곳이다. 이곳에 세워진 통일전선탑에는 정진석이라는 이름이 남북대표자연석회의 당시 ‘남조선기자대표단 대표’라는 명의로 새겨져 있다.

이같은 사실은 기자협회가 지난 8월 조선기자동맹과 언론교류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파견한 대표단의 방북 일정 과정에서 확인됐다. 정진석씨는 회담 당시 자유신문 편집국장이었다. 북측 관계자들은 정씨가 50년 6·25 전쟁 때 월북했으며 이후 김일성대학 철학교수를 역임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48년 4월 남측의 기자단은 어떻게 구성됐고 어떤 취재활동을 벌였는가. 이같은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당시 기자단 일원이었던 설국환 대한여행사 회장(사진)을 9일 만났다. 설 회장은 45년 합동통신에 입사, 남북연석회의 당시인 48년에는 편집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설 회장은 60년 한국일보 주미특파원, 66년 논설위원을 끝으로 언론계를 떠났다.

남북연석회의를 앞둔 4월 어느날 설 부장은 편집국장으로부터 취재단에 합류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치부장의 고사로 이같은 기회를 얻은 설 부장은 “당시 공식적인 기자단은 5개 언론사 5명의 기자였다”고 회고했다. “양측에서 사전에 기자 5명으로 합의한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앞서 통일전선탑에 이름을 남긴 정씨는 ‘공식’ 기자단 일원이 아니었던 셈이다.

이렇게 꾸려진 기자단은 설 부장, 김동석 서울타임스 주필, 서광재 독립신보 편집국장을 비롯해 한성일보, 조선통신의 조규희, 최명소씨 등이었다. 그러나 방북길은 순탄치 않았다.

4월 19일 남북대표자연석회의 개막을 앞두고 출발해 개성, 여현을 거쳐 남천에 다다랐으나 북측 수행원이 평양으로 안내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흘을 남천에서 보낸 후 기자들은 평양행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열차에는 기자들을 비롯해 ‘비공식적으로’ 방북하는 인사들이 모여있었다.

평양에 도착한 후에는 또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연석회의는 19일 개막돼 23일 1차 회의를 마무리하고 26일부터 남측의 김구, 김규식, 북측의 김일성, 김두봉 등 이른바 4김회담이 진행됐다. 설 부장은 “평양에 도착하자 이미 공식 회의 일정은 끝난 상황이었다. 4김 회담 내용은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일주일간 일정은 연석회의 지지 평양시 군중대회 참관을 비롯 각종 관광, 시찰 등으로 채워졌다.

이 과정에서 4월 29일, 김일성 위원장과 남측 기자단의 ‘역사적인’ 기자회견이 있었다. 여기에는 한설야 노동당 문화부장, 허정숙 대변인 등이 배석했다. 비공식적으로 방북한 전체 기자단이 20여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알았다. 설 부장은 한설야씨를 당시 조선중앙통신 주필로 기억하고 있었다.

회견 석상에서 김 위원장은 설 부장에게 먼저 물었다.

“설국환씨, 와서 보니 이북과 이남의 자유가 어떻게 다른 것 같습니까.”

“이북에서 자유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남측에서 말하는 자유의 의미와는 다른 것 같은데 실제로 북의 자유가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김 장군이 설명해주면 그대로 보도하겠습니다.”

설 부장은 “그때 배석했던 한설야씨나 허씨가 당황하던 기색이 역력했지만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번엔 설 부장이 물었다.

“‘외국군대 즉각 동시 철수’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모스크바 회의 직후 신탁에 찬성했던 것과는 모순된 태도 아닙니까.”

여기에 대해서도 김 위원장은 “3년 전과 지금의 정세는 다르다”고만 언급했다.

이날 회견은 ‘잘 보고 잘 돌아가라’며 김 위원장이 기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마무리됐다. 회견을 마치고 설 부장이 숙소로 돌아오자 또다른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설야씨가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한씨는 “오늘 회견 내용은 오프로 하자”고 요구했다. 설 부장은 이에 대해 “사전에도 아니고 회견을 마친 후에 오프를 요구하는 게 어디 있냐”고 항의하면서도 “모쪼록 이런 식의 접촉이 계속되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오프를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다만 조선중앙통신에서 이날 회견 내용을 기사화 한다면 나도 남에 내려가 기사를 쓰겠다”고 덧붙였다. 이후 조선중앙통신의 관련 보도는 없었다고 한다.

설 부장은 “당시 김동석씨를 비롯해 협상 후 남으로 내려오지 않은 기자들도 적잖았다”고 회고했다. 남북에 단독정부가 수립되기 직전, 최초의 방북취재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설 부장은 기자협회의 남북 언론교류 추진 소식을 접하면서 ‘좋은 결과’를 기대했다.

“그때한설야씨에게 ‘접촉이 계속되길 바란다’고 말한 것도 그런 의미였습니다. 이젠 상황이 많이 무르익었으니 언론교류도 잘 되리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