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이 언론을 상대로 제기하는 명예훼손 소송이 급증하고 있다. 그러나 공인과 공공의 이익, 공적 관심사라는 국민 알권리 보다 개인의 명예권에 손을 들어주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어 언론자유의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언론이 개인의 명예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은 엄격히 자제해야 하지만 공직자를 비롯한 공인에 대한 언론활동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차용범씨가 박사학위 논문 ‘언론에 의한 공인의 명예훼손 연구’(2000)에서 1960년부터 2000년 상반기까지 94건의 판례를 분석한 결과 공무원이 제기한 소송이 18건(19%)으로 가장 많았고 정치인과 연예인이 각 11건(11.5%), 언론인 10건(10.5%), 공무원과 정치인의 친인척 5건(5.3%) 등으로 공인에 의한 소송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보도내용은 주로 ▷공무원의 공적업무에 관한 사항 15건 ▷정치인과 친인척의 전력·불법·비리 12건 ▷연예인 관련 불법·선정보도 10건 ▷언론인 관련 허위·과장보도 10건 ▷공무원 전력·불법·비리 7건 ▷기업 불법·비리 7건 등으로 나타났다.
94건 판례 가운데 언론사가 승소한 경우는 17건으로 18.1%의 승소율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인이나 검사가 제기한 소송에서 언론사가 승소한 경우는 단 한건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99년과 2000년 상반기에 17건의 명예훼손 소송 판결이 있었으나 언론이 모두 패소했으며 이 가운데 공인으로 분류되는 공직자와 정치인이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 10건도 모두 패소했다.
이와 관련 차씨는 “한국 법원이 공무원이나 정치인, 그 친인척, 연예인 등 세칭 공인 관련 보도에서 아직 공인 개념을 제대로 적용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며 “일반인에 대한 보도보다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의 불법, 비리, 전력 등에 대한 보도를 더욱 엄격히 제한함으로써 정치적 사안에 대한 폭넓은 토론이나 적극적 비판이라는 언론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언론보도로 인한 개인의 명예훼손 판례 분석’(1998)이란 논문에서 공인에 대한 보도의 한계를 살핀 임유진씨도 “공무원의 공적업무, 일반인들에 대한 보도에서는 한국 언론이 어느 정도 자유롭지만 정치인과 그들의 친인척과 같은 정치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제재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임씨는 또 “공인 개념이 정치적 권력자들에 대한 언론의 비판을 보호하기보다는 연예인과언론인들에 대한 보도를 보호하는데만 치중돼 왔다”고 지적했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과 공무원보다 연예인과 언론인이 더 공인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차씨의 논문에서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45명과 전문가 30인, 언론학 전공 학생 30인 등을 상대로 ‘공인 개념’에 대한 의견을 조사한 결과 최근 공인들의 소송이 급증하는 추세와 관련 ‘공인의 범주를 확대하고 판례부터 바꿔야 한다’, ‘공인과 일반인을 구분해 판결에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공인은 그의 공적지위에 따라 보다 폭넓고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차씨는 “공인에 대해 명예훼손을 적용할 때는 언론이 기사조작과 같은 고의가 있거나 진위파악을 지나치게 경시했을 경우에만 책임을 부담시켜야 한다”며 “법원이 명예훼손 소송을 다루면서 공인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언론은 보도과정에서 기본적인 대응원칙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