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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쌍시옷 문화

오형규 |한국경제  2001.11.1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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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쌕’ ‘쪽‘ ‘깔’ 의 뜻을 아십니까.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청소년 은어사전’에 나오는 말들이다. 섹스, 얼굴, 여자를 뜻하는 말이다. 청소년 은어사전에 나온 말의 90% 이상이 쌍시옷 등 된소리다. ‘…한다’를 ‘…때린다’로 바꿔 쓴 지 오래됐고 소주를 ‘쐬주’로, 효과를 ‘효꽈’로, 게임을 ‘께임’으로 발음해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이 됐다.

심지어 데스크들이 기사를 넘길 때도 ‘쏜다’고 한다. 출세조건을 쌍기역(꿈 꼴 꾀 깡 끼)으로만 표현하는 우스개도 있다. 이제 된소리 문화는 연령 지위 계층에 관계없이 보편화된 현상이다.

여중생들조차 육두문자를 자유자재로 쓰는 세상이다. 접촉사고가 나면 운전자들은 어김없이 서로 멱살을 잡고 ‘X같은’ ‘Y할‘ ‘Z자식’ 같은 말들을 주고받는다. ‘친구’ ‘신라의 달밤‘ ‘조폭 마누라’ ‘달마야 놀자’ 등 요즘 조폭류(流) 영화들은 욕지기의 교본이나 마찬가지다. 하긴 국회의원조차 신문이 마음에 안 든다고 ‘X같이’라고 하는 판이다.

된소리, 말 폭력이 득세할수록 이 땅에 살기가 힘들어진다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다 영어 사대주의는 끝이 없다. 심지어 영어를 공용어로 쓰자는 얘기까지 나오는 판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코스닥시장의 벤처종목 이름을 보라. 외래어 안 들어간 우리말 이름은 과연 몇 개나 될까. 수백 개 종목 중 불과 30여 개다. 삼애실업이 삼애인더스가 되는 식이다. 우리말 이름은 벤처기술과는 거리가 멀고 왠지 촌스럽게 들리나 보다.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이후 관료나 교수들부터 영어 한 두 마디 섞어야 유식하다고 자부한다. 기업 지배구조는 ‘코퍼리트 거버넌스’라고 해야 직성이 풀린다.

언론계도 예외가 아니다. 한겨레가 생길 때까진 괜찮았는데 요즘엔 스포츠투데이 파이낸셜뉴스 굿데이에다 오마이뉴스 이데일리 머니투데이…. 방송사 뉴스도 뉴스데스크 나이트라인이어야 그럴 싸 해 보이나. 언론노련이 만드는 신문도 꼭 ‘미디어오늘’이어야 하는지.

일전에 언론계 한 선배가 축구의 어시스트를 ‘도움주기’로 줄기차게 쓴 끝에 지금은 쉽게 통하는 말로 만든 사례를 자랑스레 기고한 적이 있다. 하면 되더라는 것이다. 그 선배는 우직스럽게도 아이언샷을 ‘쇠채치기’로 쓰자고 제안했다. 하나은행 한빛은행 등 순 우리말 이름이 오히려 고객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심을 수 있다.

언어는 생각을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글과 말을 홍수처럼 쏟아내는 언론이야말로 우리말을 가꾸고 지켜야 할 파수꾼이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