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례행사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는 수능시험이 지난 7일 끝났다. 수능시험은 집안에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이 있는 지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의 관심사가 된 지 오래됐고, 그래서 언론에 있어서는 ‘수능’을 대신할 만한 ‘꺼리’가 있을까 싶을 정도지만 해마다 반복되는 이 재료를 어떻게 색다르게 요리해야 하는 지가 관건이다. 그래서인가?. 이번 해는 이렇게 요리해보고, 그 다음 해는 반대로 요리도 해보고 하면서 맘대로 주물럭 거리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드세지고 있다. 겨우 한해 사이에 ‘너무 쉽다’고 두들겼다가, ‘너무 어렵다’고 넉아웃을 시킨 행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난 해 이맘 때 보도를 보면 일부 언론사를 제외한 대다수가 ‘변별력 떨어진 수능’이라며 비판의 일성을 가했다. 당시 변별력 시비는 최상위권 몇 퍼센트의 학생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주장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 막대한 사교육비를 들여 공부한 학생이 학교교육에 충실했던 학생과 성적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정말 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불만일 뿐이었다. 이같은 상황을 모를 리 없는 언론이 소수의 목소리를 마치 전체를 대변하는 양 여과없이 보도했다.
이번 수능문제 출제진은 지난 해에 있었던 이같은 비판이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출제위원장이 밝힌 내용에서도 이같은 고민은 쉽게 읽혀진다. 오락가락한 그네들의 잘못을 언론 탓으로 돌린다고 보기에는 지난해의 돌팔매질이 너무 매서웠다. 그런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에는 ‘널뛰기 수능’이니, ‘넋나간 고3교실’이라며 어려운 수능에 언론이 호들갑이니 어느 장단에 춤춰야할 지 교육당국도 혼란스러울 것이다.
관행처럼 굳어진 입시관련 보도의 부작용은 누구보다 일선 기자들이 더욱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교육부 출입기자들은 교육정상화를 돕기 위해 지난 97년부터 자체적으로 ‘대학입시 보도강령’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가운데는 특정대학이나, 학교의 서열화를 부채질하는 기사는 일절 보도하지 않기로 한 내용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 보도되는 내용을 보면 이같은 결의가 무색해지기 일쑤이다. 교육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국민들을 상대로 수능보도만큼 잘 먹히는 기사는 없고, 그래서 결국은 상업성을 위해 바람직한 교육풍토는 애써 외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심증을 굳히게 된다.
해마다 반복되는 입시혼란에 있어 언론은책임을 비켜갈 수 없다. 십대의 어린 학생들이 어느 초겨울에 한번 치른 시험의 결과가 인생의 상당부분을 결정해버리는 학벌사회에서 이에 편승해 상업적 이익만을 노린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언론이 비판의 날을 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이제는 실천만이 남아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