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개혁이라는 명제가 올해만큼 빈번히 제기된 해는 없었다. 언론개혁만큼 자주 등장한 말이 또하나 있었다. 언론탄압이다. 한해가 마무리되는 지금, 세무조사를 둘러싼 언론탄압 공방에 묻혀 정작 언론개혁의 기본 과제들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높다. 정부여당, 야당, 언론계, 언론시민단체 등의 평가와 이들 진영에서 자성의 목소리는 없는지 짚어봤다.
■ 정부 여당
‘욕심’만 있고 ‘정책’은 없었다
개혁 프로그램 부재…당정 협조도 미흡
언론에 관한 한 정부는 자율개혁 원칙을 고수해왔다. “언론자유를 보장하며 언론개혁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세무조사는 언론자유와 무관하며 세무비리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자율개혁 원칙만을 되풀이하며 언론개혁 전반에 대한 공론화나 정책적 접근에 실패했다는 데 있다. 세무조사, 공정거래위 조사 등 일련의 조치로 ‘정치적 의도’를 둘러싼 언론탄압 공방이 정치권과 언론계를 휩쓸었음에도 불구, 정부는 ‘세무조사와 언론개혁은 무관하다’는 점만을 강조하며 거리두기에 급급했다. 탄압 공방을 넘어선, 언론 정책이라는 프로그램이 없었다는 반증이다.
일례로 세무조사, 공정거래위 조사는 2000년 12월 언론개혁시민연대와 기자협회가 국민 1000명과 신문기자 2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그 필요성이 인정된 조치였다. 당시 국민들과 기자 85%는 공정거래위 조사가, 국민 86%와 기자 85%는 세무조사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연초 세무조사 등은 이같은 여론을 일정 부분 반영한 측면도 있었으나 탄압 공방에 휘말리자 더 이상 진전된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언론과 결별이라는 ‘성과’를 제외하면, 정부의 언론정책 부재를 재확인 시켜줬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세무조사=언론개혁’이라는 등식을 둘러싼 혼란만 가중됐고 언론발전위 구성, 정기간행물법 개정 등 개혁 방안들은 논의의 터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언론 ‘정책’에 대한 정부여당내 논의가 활성화한 것도 아니었다. 민주당의 한 의원측은 “이제까지 부처 입법안 등을 제외하면 언론에 대한 공식적인 당정협의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세무조사로 탄압공방은 공방대로 흘러갔고 국회 내 소위 등 언론문제를 논의할 자리를 만드는 데에도 실패했다”는 평가다. 최근 TV중간광고 등을 둘러싼 방송위, 문화부, 재경부의입장 차나 공약이었던 대한매일 소유구조 개편과정에서 벌어진 문화부와 재경부의 책임 떠넘기기 등 정책 혼선을 노출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반면 언론탄압 공방을 둘러싸고 국감 등을 통해 민주당 의원들의 언론개혁 발언은 적잖게 제기됐다. 산발적인 의견 개진만 있었을 뿐 체계적인 논의는 없었던 셈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특정기관이 언론을 휘어잡고 통제하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다소 혼선을 빚더라도 해당부처별로 역할을 분담하는 게 적절한 것”이라며 “언론개혁은 청와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원칙엔 변함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언론개혁은 자율에 맡긴다’는 원칙이 ‘언론정책 없음’을 뜻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간과했다. 이같은 문제는 세무조사를 둘러싼 언론탄압 공방 속에 정작 이전부터 제기되어 온 언론개혁의 기본 과제들이 묻혀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김상철 기자
■ 야당
‘원칙’없이 실리 따라 ‘왔다 갔다’
밥그릇 챙기기 급급…일부 언론 대변인 자청
언론개혁과 관련, 야당이 받고 있는 비판은 지나치게 ‘실리’를 밝혔다는 것이다. 언론사 세무조사의 ‘정치적 의도’를 부각시키고 이에 따른 반사이익을 취하는 데 치우쳤다는 지적이다. 언론내부의 ‘서로 다른’ 시각에 대해서도 언론 전체의 정서나 입장을 대변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유의미하다고 판단되는 일부 거대 언론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쪽에 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런 지나친 실리계산은 언론개혁에 대한 일관성 없는 태도로 나타났다. 한나라당은 언론발전위 구성이나 정간법 개정 등 세무조사 이전 긍정적 입장을 보였던 언론정책에 대해 반대 입장으로 돌변했고, 자민련은 DJP공조가 붕괴된 이후 세무조사가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입장에서 ‘언론탄압’이라는 입장으로 방향을 선회하기도 했다.
실제 올해 초 <미디어오늘>이 국회 문광위원 소속 의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한나라당 소속 의원 9명중 7명이 정간법 개정과 국회 언론발전위 구성에 대해 찬성 입장을 보였고, 자민련 정진석 의원도 정간법 개정에는 ‘연구중’이라며 답변을 유보했지만 언발위 구성에는 찬성 입장을 밝힌바 있다. 여야간 타협의 여지가 어느 정도 있었고, 국회가 논의의 장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적게 나마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무조사 이후 야권은 언론문제에 대한 여권과의 타협가능성을 스스로 봉쇄했다.
한나라당 문광위 간사인 고흥길 의원측은 “언론사 세무조사와 신문고시, 사주 구속 등 일련의 언론탄압이 이어지면서 언론개혁에 대한 논의가 이뤼질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언론발전의 두 축은 언론자유와 언론개혁인데, 언론이 탄압을 받으면서 언론자유가 더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고 자연히 언론개혁 문제는 공론화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언론개혁’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부영 의원이나 김원웅 의원 등 한나라당 소속 개혁파 의원들은 언론사 세무조사와 무관하게 정간법 개정 등 언론개혁을 제도화해야 한다며 ‘자성론’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의원들의 움직임은 법안 발의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같이 한나라당이나 자민련이나 언론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쉽게 부정하지는 않고 있다. 다만 정부여당의 언론탄압이 개혁 논의를 막는 ‘걸림돌’이 됐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야권은 신문시장 정상화, 편집권 문제 등 세무조사와 연계시키지 않고도 처리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전혀 접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1년 넘게 표류하고 있는 언론발전위 구성 문제나 상임위 상정조차 못하고 있는 정간법 개정 문제는 야당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박미영 기자
■ 언론계
개혁 주체임에도 내부 논의 없어
한 목소리 없이 양분화…탄압공방 되풀이
한 기자는 올해 언론 일선의 양상을 이렇게 평가했다. “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아니, 한 목소리가 없다.” 세무조사와 공정거래위 조사가 이어지면서 언론계 양분화가 심화, 확산된 한해로 기록될 것이라는 말이다.
올 한해 신문과 방송 지상에서는 전례 없이 언론개혁과 탄압을 둘러싼 요구와 주장을 쏟아냈다. 이 과정에서 ‘상호비평 활성화’라는 기대와 ‘자사 홍보·타사 공격용’이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으며 미디어면, 매체비평 프로그램이 활성화되기도 했다. 외부는 물론 언론계 내부에서도 언론의 제반 문제와 과제를 공론화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새로운 언론질서에 대한 ‘공론의 장’은 형성되지 못했다. 정쟁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듯한 탄압이냐, 개혁이냐는 공방 속에서 언론개혁을 위한 고민과 모색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한 정치부 기자는 “결과적으로정치권의 공방과 다를 바 없었다”고 말한다. 이 기자는 “흔히 ‘정쟁만 있지 생산적 논의는 없다’는 정치권에 대한 비판처럼 언론계 역시 개혁과 탄압이라는 주장이 맞서 평행선만 그었다”고 지적했다. 탄압 논란 속에 정작 당사자인 기자들과 언론 일선의 ‘발언’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때문에 언론 내부의 동력이나 중지가 모아지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공방과 양분화를 둘러싼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 신문사 차장은 “언론계를 둘러싼 상황 인식과 판단이 다른 데 어떻게 내부동력을 모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이 차장은 “내부나 외부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세무조사 등 일련의 국면을 파악하는 시각 차가 명백히 존재했고 지면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고 말했다. ‘첨예한 양분’은 당장의 운신과 논의의 여지도 좁혀 놓았다. 한 기자는 “굳이 큰 과제가 아니더라도 기자윤리나 자정, 취재시스템 등 개선방안을 모색할 여지는 있었다”면서 “언론과 관련한 어떠한 발언도 ‘탄압, 개혁 어느 쪽이냐’로 해석될 여지가 많았던 상황에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렇다고 제반 문제가 양분화 양상으로 떠넘겨지는 것은 아니다. 언론탄압 주장에 뒤이은 ‘자율개혁’이라는 명분도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사의 세무조사 결과 자체 공개나 ABC 추가 가입 등을 제외하면 발행인, 간부 차원에서든 기자들 차원에서든, 자율적인 논의나 자율개혁 차원의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 신문사 논설위원은 “언론사간 경쟁논리, 자사 이기주의가 탄압 공방을 거치면서 언론의 양분화 양상을 깊게 만든 측면이 있다”면서도 “이 문제가 언론 개혁·발전 과제에 대한 내부 논의를 회피하는 ‘핑계거리’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상철 기자
■ 언론시민단체
언론개혁 운동 국민 참여 미흡
대부분 단체중심…대중화 위한 접근 필요
올해 언론시민단체들의 언론개혁을 위한 활동은 대중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과거 언론시민단체들의 언론개혁 운동이 법·제도 개선을 위한 국회나 정부 압박 활동에 집중되면서 수용자인 일반 국민들의 관심이나 참여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자체 평가에 따른 것이다. 언론사 노조와 언론관련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돼 진행돼 온 언론개혁 운동의 참여 폭을 국민적차원으로 확대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지난 3월 언론개혁시민연대 산하기구로 전국의 160여개 단체가 참여한 신문개혁국민행동이 발족한 것도 이런 언론개혁 운동의 대중화라는 과제 해결을 위한 조직적 정비라고 볼 수 있다.
실제 언개연과 신문개혁국민행동은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 실시를 전후한 시점에 각종 집회와 시위, 문화행사 그리고 서명운동 등 다양한 방식의 활동으로 언론개혁을 사회적 이슈로 제기하고 국민적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지난 11월 진행된 신문개혁을 위한 전국 자전거 대행진의 경우 그 상징성이나 실제 해당 지역 시민단체들의 관심과 참여도 등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또 이전까지는 당위적 차원에서 지지와 연대를 선언하는 수준에 그쳤던 민주노총 등 일반 시민사회단체들의 조직적 참여와 공동행동을 이끌어 낸 것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민주노총의 경우 ‘조선일보 구독거부’ 운동을 주도,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올해 언론시민단체들의 활동에서 짚어볼 문제 역시 적지 않다.
특히 올해 언론시민단체들이 내건 언론개혁 운동의 ‘대중화’는 일정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숙제로 남아 있다. 각종 집회나 시위, 문화제 등 대중적 참여를 담아낼 활동들이 많이 이뤄졌고 민주노총이나 한총련 등 사회단체들도 가세했지만, 실제 구독강요나 경품 등 시장교란행위와 왜곡보도 등으로 피해를 입는 대다수 국민들이 참여하는 수준의 ‘대중화’는 아직 멀기만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집회, 시위, 문화제 등이 주로 조직화된 단체 중심의 활동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대중화를 위한 새로운 접근방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김동민 신문개혁국민행동 집행위원장은 “언론개혁 운동에 일반 국민들의 참여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선 언론, 시민단체들이 이제부턴 ‘해결사’가 돼야 한다”며 “그들의 피부에 와닿은 문제, 예를 들면 신문을 강제 투입하는 지국을 직접 항의 방문하는 등의 방식으로 해결하면서 신문개혁의 필요성을 알리고 참여를 독려하는 활동을 벌여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