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신고해 접수된 부분에 대해 판매국장님들이 규약 준수에 따른 적극적인 피해보상을 약속해 주신다면 공정경쟁규약을 지키겠습니다. 이 공문을 받으신 후 답변이 없으시다면 앞으로 불법판촉을 인정하며 규약 준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알고 저도 살길을 찾겠습니다.”
유력 중앙일간지의 수도권 지국장이 지난 5월 각 신문사 판매국장과 신문협회 산하 공정경쟁규약 집행위원회 앞으로 보낸 내용증명의 일부다. 경품살포 등 올 들어 판매시장의 혼탁상이 재연되면서 공정판매를 촉구한 공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곳에서도 답변은 없었다. 지난 14일 기자와 만난 이 지국장은 “나도 경품을 뿌릴 수밖에 없는 것이냐”며 여전히 ‘살길’을 고민하고 있었다. 관련기사 5면
97년 10월부터 지국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 바닥’이 개선될 조짐은 좀체 찾기 어려웠다. 2000년 말 경품 제공을 전면 금지하는 등 규정을 강화한 공정경쟁규약이 시행되면서 한동안 과열양상이 사그라지는 듯 싶었다. 그러다 한 경쟁사가 부수 하락을 문제삼아 해당 지국장을 교체하면서 ‘평화 기간’은 끝났다.
“그 지국장은 오자마자 두달여만에 순수 판촉비만 5000만원을 쏟아 부었습니다. 또다른 신문사 지국장도 합세했죠. 어느 한군데에서 치고 나오면 또다시 혼탁상이 재연되는, 판매시장의 고질병이 다시 도졌습니다.”
10월로 접어들면서 그나마 음성적으로 이루어졌던 경품 제공을 대놓고 하기 시작했다. 트럭 채로 경품을 실어 나르고, 판촉요원들이 휩쓸고 다녔다. 무가지 6개월 이상 제공은 기본이었다. 이같은 경품 공세로 경쟁사 지국들은 800여부 안팎을 확장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또다시 공정경쟁위원회 고발에 나섰다. 10월 8일부터 한달여간 17건에 이르는 경쟁사 지국의 장기 무가지와 발신자 표시 전화기 등 경품 제공 사례를 고발했지만 위약금 부과 등 제재조치는 통보받지 못했다. 정작 본인은 지난해 3∼4개월 무가지, 올해 5∼6개월 무가지 제공 등으로 각각 44만원, 48만원의 위약금 부과 판정을 받았다.
“전국적으로 공정경쟁규약의 2개월 무가지 제공 규정을 지키는 지국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러 경품을 요구하는 독자들한테 ‘싸구려 중국산 써봐야 얼마 못갑니다. 차라리 한두달 더 넣어드릴테니까 그 돈 모아서 다른 거 사세요’ 하면서 넣었던 겁니다.”
정작 본사에서는위약금 빨리 납입하라고 독촉이다. “제가 고발한 경품 제공 사례가 처리되면 그때 내겠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대놓고 말은 안하지만 ‘너는 왜 경품 안쓰냐’는 식입니다.”
물론 뭔가 해보려고 시도한 해도 있었다. 99년이었다. 자신을 포함한 4개 신문사 지국장들이 500만원의 공탁금을 걸고 경품은 구독료의 절반(5000원) 수준에서 사용, 무가지 제공 기간 3개월 등의 원칙에 합의했다. 합의사안을 위반하면 100만원의 벌금을 내기로 하고 공증도 섰다.
이 원칙은 1년여간 잘 지켜졌으나 한 지국장이 본사 압력에 못이겨 결국 2000년 5∼6월 경 다시 에어컨선풍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깨져버렸다. 합의를 깬 지국장도 잘 된 것은 아니었다. 그 지국장은 8000만원의 빚을 지고 그해 여름 지국을 정리했다.
“4개 지국장들이 자체 합의한 시기 외에는 경품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고발도 소용없고,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경품을 쓸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고민스럽습니다. 신문고시든 공정규약이든 아무도 지키려하지 않고 규제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무슨 실효가 있겠습니까.”
타사의 경품 공세로 지난달 당월유가도 50부가 줄었다고 한다. 통상 6개월은 무가지로 제공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매달 그 여파가 나타날 것으로 전망한다. “못해도 200∼300부는 줄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 지국장은 이달 초 인근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갔다. 하루는 자신이 집에 없을 때 저녁 9시가 넘어 한 지국장이 찾아와서는 ‘무가지 6개월 넣어드리겠다. 발신자 표시 전화기, 카페트, 온풍기 중 어느 것을 가지시겠느냐’고 구독을 권유하더라며 씁쓸해하기도 했다.
“더러 우리 지국에 판촉요원들이 들르기도 합니다. ‘경품 쓰는 게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냐’고 물으면 ‘내년 대선까지는 끄덕 없다’고 합니다. 선거 앞두고 누가 언론을 건드리겠느냐는 겁니다.”
배달 시간이 임박하자 이 지국장은 이 말만은 꼭 넣어달라며 채비를 서둘렀다. “차라리 규약 위반시 위약금을 본사에서 물도록 하라고 하십쇼. 최소한 지국에 확장 강요하는 일은 적어질 것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