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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전·현직 이사 900억 배상판결

언론 '전향 판결'서 '투자 위축' 선회

박미영 기자  2002.01.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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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이사들에게 경영책임을 묻는 것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을 감옥에 집어넣은 것과 비슷하다. 경영상의 의사결정 과정만을 흠잡아 거액을 배상시키는 것은 최우등생에게 공부하는 방법을 흠잡아 낙제를 주고 거기다가 체벌을 주는 것과 똑같다. 아니면 교활한 순 억지다.”

지난 3일자 중앙일보 시평 ‘은밀한 반시장 혁명’은 지난달 27일 수원지법이 삼성전자 전·현직 이사 9명에게 경영부실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회사에 900여 억원의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린 데 대한 일부 언론의 시각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들 언론은 이번 판결이 ‘거수기’ 이사회로서의 관행에 쐐기를 받았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축소하거나 ‘경영 위축’ 등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고 나섰다. 특히 판결이 내려진 직후 긍정적인 평가를 보이던 언론들까지 경제5단체가 성명을 발표하고 나선 이후 재계의 목소리를 부각시키며 논란으로 몰아갔다.

지난달 28일자 대부분의 신문은 이번 판결 내용을 1면 머릿기사 등으로 비중 있게 보도했지만 의미를 해석하는 데는 신문마다 차이를 보였다. 일부는 ‘재벌 거수기 이사회 관행에 쐐기’(조선, 대한매일), ‘거수기 이사 무책임 문책’(경향), ‘주주무시 재벌독단 제동’(한겨레) 등의 의미를 부각시킨 반면 중앙, 동아 등은 재계와 주주대표소송을 낸 참여연대의 입장을 나란히 보도하는 등 ‘중립적’인 모습을 보였고 경제지들은 ‘경영위축·소송남발 우려’ 등 재계 입장 중심으로 보도했다. 특히 매일경제, 서울경제 등은 28일자 가판 신문에 이를 전혀 보도하지 않는 등 사실 자체를 축소하기도 했다.

이같은 언론의 보도 태도는 경제5단체가 ‘삼성전자 손배판결은 경영활동에 장애가 된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더욱 재계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경향신문은 지난달 29일자 사설 ‘경영판단과 법적 책임’에서 “실패한 경영판단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운 부분에 대해서는 문제의 소지가 없지 않다”며 “이번 사례가 적법하지 않은 판단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항소심 과정에서 철저히 따져봐야 할 것”이라며 재계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조선일보도 같은 날 사설 ‘투명과 책임경영을 향해’에서 이번 판결이 “기업의 투명경영, 책임경영 체제를 정착시키는 데 일대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경영인에게 과도한 책임을물음으로써 경영활동의 위축을 초래할 소지가 있다는 재계의 우려는 경청할 부분이 있다”며 한발 물러섰다. 이외에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도 관련 사설을 게재하고 ‘투자부진’ ‘보신주의’를 확산시킬 우려가 있다는 재계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번 판결이 실패한 경영판단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절차와 충분한 검토를 거치지 않은 데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라는 점은 간과된 채 경영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는 재계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준 것이다.

그러나 한겨레는 같은 날 사설에서 “재벌 기업의 이익을 총수의 이익과 동일시하는 생각에서 나온 단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며 재계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일축했고, 국민 대한매일 한국 등이 같은 기조를 유지했다.

한편 중앙언론사 가운데 유일하게 사설을 게재하지 않은 동아일보는 지난달 29일자 2면 3단 크기로 ‘삼성전자 손배판결은 경영활동에 장애’라는 제목으로 경제5단체의 성명을 크게 보도하는 등 재계의 입장을 부각시켰다. 이는 조선일보가 같은 날 1면 2단으로 양측의 주장을 나란히 실은 것과도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