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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기자 투혼 후배사랑도 치열

김용택 전 동아 사진기자 고엽제 보상금 모아 사진기자회에 1억 전달

박주선 기자  2002.01.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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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 월남전 종군기자로 활약, 후유증으로 두 눈 실명





새해 초 후진 양성을 위해 1억원을 내놓은 한 기자 얘기가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95년 말부터 정부에서 받은 고엽제 피해 보상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 8000만원과 사재 2000만원을 털어 1억원을 기탁한 그는 김용택(70) 전 동아일보 사진기자.

김 전 기자는 67년 월남전 당시 종군기자로 파견돼 70년대 초부터 고엽제 후유증을 겪어 왔다. 두 차례의 수술도 소용없이 88년에는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었다. 고엽제 후유증은 말초신경 장애로 두 손으로 숟가락조차 들기 어렵게 하고 신장장애, 당뇨 등 이중, 삼중고를 안겨줬다. 하지만 후배 사랑만큼은 꺾지 못했다. 95년말 민간인으로서는 최초로 고엽제 피해 보상금을 받기 시작하면서 매달 100여 만원씩을 모아 6일 사진기자협회(회장 석동률)에 1억원을 기탁한 것이다.

석동률 회장은 “당신은 허름한 가구와 소박한 살림을 사시면서 큰 돈을 선뜻 내놓아 너무 감사하다”며 “‘김용택 기자상’을 신설해 매년 열리는 보도사진전에 맞춰 시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기자는 54년 광주신보사에 입사해 자유신문, 경향신문을 거쳐 63년 동아일보로 옮긴 뒤 74년 건강 악화로 퇴사하기 전까지 21년간 현장을 누볐다. 키 178㎝, 몸무게 93㎏의 건장했던 김 전 기자는 “탱크처럼 밀어붙이고, 코끼리처럼 체구가 크다고 붙은 별명이 ‘탱크’ ‘코끼리’였다”며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20년 이상 병마와 싸우면서 예전 기억은 희미해졌을 법도 한데 취재 당시 상황은 물론 일시까지도 정확히 기억해냈다.

60년대 정동 법원에서 청계천에 있는 자유신문 사무실까지 마감시간을 맞추기 위해 사진을 들고 뛰어다니던 기억, 62년 8월 28일 순천 홍수 취재를 위해 광주에 갔다 철길이 끊겨 현지 접근은 엄두도 못내고 전남일보의 도움으로 현지사진을 손에 넣어 외상 비행기를 타고 타 중앙지보다 빨리 현장을 보도해 월급 8500원보다 많은 상금 1만원을 탔던 기억, 67년 6월 16일 월남전 파견 당시 찍은 ‘베트콩 검문소’로 한국신문회관 주최 보도사진전 대상을 수상한 기억 등. 특히 65년 2월 19일 대일굴욕외교에 항의하는 국회의원들의 데모대열에 앞장섰던 윤보선 전 대통령이 진압 경찰봉에 맞는 장면을 담은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숨가쁘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서 김 전 기자는 “보도사진은 찍을 때는‘뉴스’지만 시간이 흘러서 색깔이 바래면 ‘역사’가 된다”며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1%의 가능성에도 도전했다”고 말했다.

은퇴 후에는 부인과 함께 고향과 가까운 정읍 내장산 입구에 터전을 잡았다.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부인이 놓아주는 주사를 맞고, 7시에 아침을 먹으면서 하루 일가를 시작한다. 주로 뉴스를 많이 듣고, 노래를 부르면서 하루를 보낸다는 김 전 기자는 애창곡으로 사월의 노래, 산타루치아, 목련꽃, 목동의 노래 등을 꼽았다. 거동이 불편하지만 동료, 선후배들과 함께 하는 행사가 있으면 종종 서울 나들이도 한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묻자 김 전 기자는 “기자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24시간 근무해야 특종을 할 수 있다. 한번 특종을 하면 다음부터는 안 되는 게 없다”며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