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 8~9월 각 언론사는 대선후보 지지도에 대한 여론조사를 하면서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탈락한 이인제씨를 김대중, 이회창 후보와 함께 조사대상에 집어넣었다. 그래서 이회창 후보 보다 이인제씨의 국민지지가 높다고 보도했다. 이인제씨가 여론조사를 이유로 탈당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언론은 이번에는 ‘경선 불복’이라며 몰매를 가했다. 경선 불복은 언론이 부추긴 것이나 다름없는 데도 말이다. 지금도 언론은 이인제씨에게 경선 불복이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아놓고 있다. 웃기는 일이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각종 권력형 비리사건과 관련, 여권 실세의 개입의혹을 이니셜로 거론하자 언론은 앞다투어 이를 보도했다. 며칠간 신문 제목이 온통 영어 알파벳으로 도배됐다. 그래놓고는 사설이나 시론, 기자칼럼 등을 통해 ‘이니셜 정치’를 난타했다. 야당 의원이 노린 것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것이라는 점을 언론이 몰랐을 리 없다. 이 또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말 한나라당이 교원정년 1년 연장과 건강보험재정 분리에 대한 법안을 국회에서 밀어붙이자 언론은 거대야당의 힘 자랑이라는 제목을 뽑았다. 그러나 법안에 대한 쟁점과 여야의 찬반 이유를 정책적인 측면에서 상세하게 보도하는 데는 미흡했다. 일부 신문은 심지어 “개혁법안이 회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교원정년을 줄이거나 늘이는 것이 개혁과 상관이 있는지, 건보 재정을 분리하자고 하면 반개혁인지 꼼꼼히 따져볼 일이다.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언론보도를 보고 냉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과 관련, 언론은 각 예비후보들이 밝히는 국가경영의 비전이나 정책에 대한 보도에는 소홀하다. 대신 따르는 의원들의 규모가 얼마냐, 영남출신 후보의 유·불리는 어떻게 되느냐, 전당대회를 언제 하는 것이 누구에게 유리하냐, 누구와 누가 연대하느냐 등의 내용을 독자들에게 전하기에 바쁘다. 요즘 한나라당에서는 이회창 총재가 김영삼 전 대통령에 어떤 구애를 했는지가 보도의 초점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권력쟁탈전, 세몰이, 의원 줄세우기, 3김식 정치 등 온갖 험담으로 대선주자들을 공격한다. 지역감정을 없애야 한다고 하면서도 대선 관련 분석기사에서 지역문제가 단연 일순위로 등장한다. 여론조사의 분석기사에서도 지역별 분석은 빠지지 않는다. 단순히웃고 넘어가기에는 심각한 일이다.
정치부 기자로서, 매일 위에서 열거한 언론의 ‘이율배반’을 충실히 따르면서 기사를 쓰는 사람이, 누워서 침뱉기 식으로 이 글을 쓴다는 것 또한 배꼽 잡을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