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신문 제작회의를 마친 오후 5시경, 하종갑 경남일보 편집국장에게는 대장이 나오기 전까지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이리저리 기사를 검색해보고 ‘소재’를 찾아본다. 4단만화 ‘애나가 선생’을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4단만화 그리는 편집국장, 하 국장의 이력은 독특하다. 젊은 시절 ‘엉뚱한 오기’에서 비롯된 인연이 자신을 평생 신문사에 몸담게 할 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만화 그리겠다” 무조건 찾아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69년. 하 국장은 경남일보 앞을 지나다가 무심코 게시판에 걸린 신문을 봤다. 만화가 없는 게 눈에 띠었다. 신문 만화가 실리기도 하고 안 실리기도 하던 때였는데 그날 마침 만화가 실리지 않았다. ‘낙서 수준’이었고 체계적으로 그림 공부를 한 적도 없었지만 “만화를 한번 그려서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다짜고짜 그림을 그려갔지만 입구에서 직원에게 “필요 없으니 돌아가라”는 말만 듣고 쫓겨났다.
“그때 그림을 잘 못 그렸다거나 그리는 사람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을 했으면 승복했을 텐데 문전박대 당하니 오기가 생겼습니다. 이후 한달여간 매일 그림을 그려서 찾아갔습니다.”
입구를 막아서던 직원도 질렸는지 편집부장에게 데려갔고 결국 “한달정도 월급 안 받고 그려 보라”는 허락을 받아냈다. 69년 7월 5일 ‘꼴랑이’라는 제목으로 첫 선을 보인 4단만화 ‘애나가 선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한달 후 수습기자 발령이 났다.
이 시절의 일화 하나. 문화부 기자가 하루는 탕수육을 그려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탕수육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 창피 당하기 싫어 모른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혼자 고민하다가 ‘탕’자가 들어가니 설렁탕, 갈비탕 이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뚝배기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림을 그려갔죠.” 편집국은 웃음바다가 됐고 그 일로 생전 처음 탕수육이란 걸 먹어볼 수 있었다.
1년여가 지난 어느날 사진기자 한명이 그만 두게 된다. 부국장이 불러 “너 사진 좀 아냐”고 물었고 “안다”고 하자 덜컥 사진기자 일을 맡겼다. “사실 카메라는 만져본 적도 없었습니다. 당장 필름 10통을 사서 찍는 연습을 했죠. 당시 경관 인질 사건 등 반향 있는 사진기사도 많이 찍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이번엔 취재 지시도 떨어졌다. 기자가 25명 정도였던 때라 사진 찍는 김에 관련 기사도 써오라는 주문을 받게 된 것.자연스레 ‘일선 기자’가 되어 갔고 입사 3년만에 정식 취재기자 발령을 받았다.
지리산 청학동 신문지상 첫 소개
72~78년 당시 기자협회 분회장으로 활동했던 하 국장은 73년 7월 지리산 청학동을 신문 지상에 처음 공개하기도 했다. 또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가 발생하자 75년 1월 18일 분회 차원에서 결의대회를 열어 동아 언론자유수호운동 지지를 결의했다. 하 국장은 당시 편집국장에게 결의내용의 1면 게재를 요구했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의문을 진주시 기자실에 보냈다. 이 내용은 ‘지방에도 언론자유 수호운동 확산’이라는 내용으로 언론에 주요하게 다뤄졌으며 이 때문에 당시 사장은 하 국장에게 출입처에 나가지 말라는 ‘금족령’을 내렸다.
“그런 징계를 받았다는 게 어찌나 화가 나던지…. 당시 사장 소유 토지에 회사 상무가 경영하던 버스 정비공장을 인근 건물에 올라가 망원으로 찍었습니다. 그리고 ‘주민들 시끄러워 잠 못잔다’ ‘먼지 많아 빨래도 못 넌다’ ‘지하로 기름 흘러 물도 못먹는다’는 요지의 기사를 사회면에 내보냈습니다.”
기사를 본 사장은 격노했지만 나중에는 잘못을 인정, 공장을 다 처분해버렸고 이후 인사에서 차장으로 승진시켰다고 한다.
사회부, 정경부, 문화부, 편집부 등을 거친 하 국장은 89년 경남일보(당시 신경남일보) 복간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부국장, 논설위원 등을 거쳐 2000년부터 편집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인의 정서> 등 12권의 책을 냈고 83년 부산MBC 신춘문예 수필 부분에 당선돼 등단도 했다.
“처음엔 단순히 만화를 그리고 싶었지만 하다보니 만화는 부업이 되고 기자의 삶을 살게 됐다”는 하 국장은 “중앙지에서 스카웃 제의도 있었지만 ‘지역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 계속 남아있었다”고 말한다. 4단만화 그리는 편집국장의 행보와, 어느덧 7250회를 넘긴 ‘애나가 선생’의 앞길을 함께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