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89년 이내창 전 중앙대 안산캠퍼스 총학생회장의 사망 사건과 관련, ‘자살’이라는 당시 경찰 조사 결과를 뒤엎었다. 대신 “사망 직전 안기부 여직원이 동행했었다”며 타살 가능성을 제기했다. 8년간 소송으로 이어졌던 89년 당시 한겨레의 추적 보도가 ‘진실’에 가까워진 것이다. 한겨레의 취재 과정을 되짚어보면서 취재 기자의 소회를 들어봤다.
어떻게 보도했나
89년 10월 4일 이공순 기자는 오귀환 당시 한겨레 민권사회부 시경캡의 취재 지시를 받고 여수로 내려갔다. 이내창씨가 거문도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것은 89년 8월 15일, 사건 발생 50여일 만이었다. 오귀환 당시 시경캡은 “학생운동과 정권이 적대적인 상황에서 총학생회장이 지방에서 자살했다는 경찰의 발표가 의문스러웠고, 기사가 충분히 되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당시 수습기자였던 이 기자는 4일 여수경찰서의 조사경위서를 살펴본 뒤 5일 이내창씨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가 보았다. 경찰조사에서 이내창씨가 안기부 여직원인 도모씨, 남자친구라는 백모씨와 동행한 사실을 목격했다고 말한 다방종업원 최희씨와 덕성호 선장 이현우씨로부터 증언을 듣는 것이 사건의 핵심이었다. 이 기자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말을 번복한 두 사람으로부터 목격담을 듣는 것은 진땀 나는 일이었다”고 기억했다.
이내창씨 사망사건은 이로써 10월 6일자 한겨레 사회면 ‘이내창씨 사망전 안기부요원 동행’ 8일자 ‘이내창씨 죽음 꼬리무는 의혹’ 제하 기사를 통해 타살 가능성이 제기되며 진실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기자는 “보완 취재를 더 한 뒤에 보도했어야 했다. 보도 이후에는 소송 등으로 후속 취재가 되지 않았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더 큰 관심 모은 소송
한겨레 보도 직후인 89년 11월 29일 안기부 여직원 도모씨는 한겨레를 상대로 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과 송건호 대표이사, 권근술 편집위원장, 이공순 기자 등을 상대로 형사소송을 제기한다. 검찰은 91년 7월 이 기자만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으나 법원은 93년 11월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내렸다. 검찰의 항소와 상고에 대해서도 96년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적시된 사실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진실하다는 증명이 없더라도 행위자가 진실이라고 믿거나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위법성이 없다”고 무죄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이 기자는 “재판부의 판결은 정치적으로 타협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판부가 기사에 나온 두 목격자의 말을 사실이라고 판단하거나 이 기자에 대해 유죄 선고를 할 경우 모두 사회적인 파장이 커질 수 있어 어중간한 판결을 내렸다는 것이다.
여전히 의문 남아
보도 이후 8년간 진행된 소송, 사건 발생 13년만에 밝혀진 의문사진상규명위의 진상 조사결과. 하지만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 했던 이들에게 여전히 풀어야 할 의문은 남아있다.
당시 이 기자의 변론을 맡았던 조용환 변호사는 “앞으로 이내창씨의 죽음에 대해 안기부의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검찰이 왜 진실을 뒤엎고 사건을 기자의 허위사실 유포로 몰아갔는지, 누구의 결정에 의한 것인지 밝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기자도 “의문사진상규명위의 조사 결과가 당시 보도보다 더 나아간 게 없다. (아직 밝혀지지 못한 진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일 큰 고민거리”라고 말했다.
이 기자의 문제의식은 언론으로도 이어진다. “진실을 파헤칠 의지가 있었다면 후속보도를 했어야 했다. 남들 눈이 있으니까 어느 정도까지만 보도하다 그쳐서는 안된다. 목격자였던 다방종업원 최희씨가 언젠가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93년 1심 재판이 끝났을 때 언론이 최희씨를 다시 만났다면 진실이 더 빨리 알려졌을 지도 모른다. 나를 포함해 모두의 잘못이다. 그런데 지금이라고 해서 안기부에서 고소한 골치 아픈 사건을 취재하려 할까. 그게 우리 언론이다. 하지만 언론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당시 다른 언론이 후속취재를 했다 하더라도 사회적 반향이 있었을까. 우리 사회가 그렇다.”
96년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 기자는 현재 뉴스쿨포소셜리서치 정치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