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난 4일 남측의 통일연대 등 4개 단체에 팩스를 보내 “조선일보의 명줄을 끊어놓고 완전히 매장해 버릴 것”을 주장한 사건을 계기로 조선일보와 북한의 ‘갈등 관계’가 또다시 불거졌다.
북한민화협 명의로 보낸 이 팩스는 조선일보가 지난달 12일자 만물상에서 ‘북한이 집단체조를 상품화한 첫 시도’, ‘파시즘 정치예술’이라며 아리랑 공연을 거론한 것을 문제 삼았다.
급기야 ‘매장’ 발언으로까지 이어진 조선일보에 대한 북한의 포문은 97년 6월 24일자 ‘김정일 물러나야’ 사설에서 촉발됐다. 조선일보는 북한의 기아 참상을 전한 KBS ‘일요스페셜’을 거론하며 “결코 ‘외국’일 수 없는 우리땅 북녘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버린 김정일 정권이 자의든 타의든 퇴진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곧바로 ‘무자비한 보복타격 불사’라는 평양방송 논평이 이어졌다. 이전에도 ‘사이비 언론’, ‘매문집단’ 등으로 남쪽의 일부 언론을 비난했지만 이 사설 게재 이후 북한은 2개월 여에 걸쳐 “우리의 불질은 조선일보사가 존재를 마치는 시각까지 각이한 수단과 방법으로 계속 가해질 것”이라는 위협을 계속했다.
이같은 긴장관계는 취재거부로 이어졌다. 98년 10월 북한은 북경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남측, 일본과 3자 회담을 가지면서 “조선일보와 KBS, 산케이신문의 취재를 거부하겠다”고 통보했다.
다음달인 11월 현대그룹을 통해 성사된 첫 금강산 관광에서도 북한당국은 조선일보와 KBS 보도진의 관광선 승선을 불허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현대와 북측의 협상 끝에 관광 마지막날에서야 조선일보와 KBS 기자들은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
2000년 들어 대립 양상은 또다시 첨예화됐다. 갈등은 2000년 6월 남북 적십자회담 취재에 나섰던 조선일보 기자의 입북을 북측이 거부하면서 폭발했다. 북측은 조선일보와 KBS의 경우 “과거 보도성향 때문에 입북 허용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선일보 편집국 기자들은 이를 ‘북한의 언론 길들이기’로 규정하며 “상호이해에 기초한 6·15 남북공동선언의 기본정신과 언론자유를 무시한 조치”라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사설에서도 “정부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언론사에 떠넘기거나 북한에 사정할 것이 아니라 일관된 취재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평양방송은 “남조선의 조선일보만이 구태의연하게 민족의 통일열기에찬물을 끼얹으며 대결을 추구하고 있다”는 논평을 냈다. 또 “조국통일의 길 위에 가로놓인 걸림돌은 들어내고 암초는 폭파해 없애버리는 것이 순리”라고 비난했다. 조선일보는 7월, 사설을 통해 “남측 내부의 분열과 조선일보 길들이기를 획책하는 북의 행태에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8월 언론사 사장단 방북 이후 북측의 조선일보 취재 불허 방침이 해제될 기미가 보이기도 했다. 당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이와 관련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조선일보 취재거부 해제를 직접 요청, 김 위원장이 김용순 비서에게 취재를 허용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같은해 12월 또다시 북측이 2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공동취재단의 일원으로 방북한 조선일보 사진기자를 2시간 30분간 억류한 사건이 벌어졌다.
북측은 당시 조선일보 관련 보도 가운데 ‘김정일 장군 호칭 잦아, 남 가족 머쓱’이라는 제목의 ‘머쓱’이라는 표현에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올들어 ‘팩스 사건’으로 다시 불거진 북한과 조선일보 관계는 좀체 ‘해빙’의 여지를 찾기 힘든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다. 남북 관계, 남북 언론교류 분야에 던져진 또다른 주요 과제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