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이 지난달 28일 국회에서 발표한 친일파 703명 가운데 언론계 인사로는 김성수, 방응모, 장덕수 3인이 포함됐다. 의원모임이 공개한 이들 3인의 주요 친일경력과 행적 관련 자료를 정리했다.
<김성수>
주요 친일경력
1937년 9월 전조선 명사 제2회 시국순회 강연 강원도반으로 피선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이사
1939년 7월 재일 조선인 황국신민화 위한 일본 내 협화회(協和會) ‘재경성 유지간담회’에 참석
19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 위원
1941년 8월 흥아보국단 경기도 위원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감사
1943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부 기획위원
친일행적
1943년 8월 5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의 정신을 찬양하라”는 징병제 찬양논설 발표
1943년 10월 학병 권유 담화 발표
1943년 11월 7일 매일신보에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는 학병권유 논설 발표
1943년 11월 8일 ‘학도 출진 장행의 밤’ 행사 개최해 “반도청년에게 순국의 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왜 학도 전원이 용감하게 지원하지 않는가”라는 요지의 격려사
1943년 11월 16일 학부모에게 전보를 발송하거나 호별 방문해 학병에 나갈 것 귄유
1943년 11월 26일 경성일보에 “황국신민의 연성에 매진해야 한다”는 요지의 담화를 게재
1943년 12월 12일 보전 장행회(壯行會)를 개최해 “학병지원은 이 시대 최고의 영광”이란 요지의 격려사
1944년 1월 22일 “징병이 닥쳐온다”는 담화를 발표해 닥쳐오는 징병에도 열심히 참여해야 함을 강조
<방응모>
주요 친일경력
1935년 친일잡지 월간 조광을 창간해 사장으로 취임
1937년 8월 애국금채회 발기인으로 참여, 황군 원호와 전비 마련 활동 전개
1937년 9월 전조선 명사 제2회 시국순회 강연 경기도반으로 피선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 실천위원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44년 9월 전쟁조력업체인 조선항공공업회사에 출자 중역으로 피선
친일행적
1940년 조광 3월호 ‘봉축 2천6백년의 기원절’, 7월호 ‘지나사변 3주년’, 10월호 ‘조광사 혁신의 사’ 등 월간 조광의 권두언 등을 통해 일본 찬양 글 발표
1941년 조광 7월호 ‘지나사변4주년’이란 권두언에서 “과거 4년간 황군의 가는 곳엔 실로 글자 그대로 적이 없었다”며 일본 군국주의 찬양
1942년 조광 2월호에 ‘타도 동양의 원구자’란 논문을 발표하고 그 뒤에도 조광을 통해 ‘징병제 실시에 감사합니다’, ‘극동위기설과 국민의 각오’, ‘해군 특별 지원병제의 광영’, ‘대동아 전쟁의 성전 의식’, ‘시정 31주년’ 등 친일 성향의 권두언과 논설들 발표
1943년 11월 14일 조선문인보국회 산하 10개 잡지사의 하나로 ‘출전학도 격려대회’를 주최했으며 자신의 사재를 출자, 고사포를 구입해 일본군에 기증
<장덕수>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당시 주필)
주요 친일경력 및 행적
1939년 2월 친일잡지 동양지광 창간기념 시국강연회에서 ‘전시체제하의 산업보국’ 강연
1939년 7월 사상보국연맹 경성본회 결성시 제4분회장
1939년 8월 국민정신선양 각도 강연 연사로 참여
19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후생부 후생위원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41년 1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 결전보국대강연회에서 ‘적성국가의 정체’ 강연
1943년 매일신보와 동양지광 등에 ‘선혈로 조국을 지키자’, ‘의무교육제의 실시를 앞두고’ 등 기고
1944년 10월 국민동원총진회에서 “대의에 철저하여야만 황국신민이 될 수 있다”고 강조
1944년 11월 학도병제 실시 사기앙양대회에서 “이 전쟁은 반드시 이긴다. 제군은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황국의 역사를 쌓아 올리는 피를 흘려라. 그리고 내지 학도와 어깨를 겨누고 같이 죽으라”고 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