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김상택 화백에게 보내는 대한매일 백무현 화백의 글이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이후 시사만화의 표현 방식에 관한 논란이 한창이다. 특히 이같은 공방은 시사만화 또는 시사만화가에게 주어진 ‘거의 무제한적인 표현의 자유’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또 균형감을 잃은 풍자나 자사 이기주의에 함몰된 작품 등이 파생시킬 수밖에 없는 사회적 해악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 동안 시사만화는 사실성에 입각해서 평가되지 않고 또 진실성을 기준으로 하여 평가되지도 않는 거의 유일한 장르로 이해돼 왔다. 한국의 시사만화에 대한 이같은 관대한 시각은 언론에 대한 탄압과 통제가 일반화됐던 역사적 경험을 거치면서 사회적 합의를 획득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 수준이 여야간 정권교체를 통해 수직 상승한 이후 국민들이 갖고있는 ‘시사만화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시각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의 시사만화계는 한국사회로부터 무책임하게 ‘표현의 자유’만 누릴 것이 아니라 이에 상응한 일정 수준의 책임을 질 것을 점점 강하게 요구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사만화의 ‘거의 무제한적인 표현의 자유’가 작가의 편협한 주관이나 해당신문사의 자사이기주의 등에 의해 오남용되는 사례는 여전히 적지 않게 관측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시사만화가 지역주의를 조장하거나 심화시키는 도구로 쓰여지는 경우다. 이 시대 언론의 많은 사명 가운데 하나는 지역주의의 극복과 사회통합이다. 시사만화도 언론의 한 부분이란 점에서 이같은 사명을 나눠 갖고 있다 할 것이다.
중앙일보 네 칸 만화인 ‘왈순아지매’(2001. 9. 28)는 노골적으로 “(보름달마저)특정지역 패거리가 먹다 버렸나”하고 호남지역 전체에 대한 반감을 보이고 있는 내용이다. 당시는 재·보궐선거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컸다고 할 것이다.
우리의 시사만화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자사의 이익을 위해 이데올로기를 교묘히 이용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조선일보 만평(2001. 6. 29)은 TV에서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로 묘사된 탱크 2대가 조선일보를 공격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고 있고, 이를 바라보고 있는 인민군들이 “우리가 할 일을 대신 해주고 있다”며 박수를 치고 있는 모습이다.
이 만평은조선일보가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다는 점과, 조선일보에 대한 세무조사는 결국 북한을 이롭게 하는 ‘용공’이며 ‘친북’이라는 냉전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밖에도 한국의 시사만화는 주제 선정에 있어 스스로 형평성이나 공평성의 문제가 있다는 점을 종종 확인시켜준다. 지방지를 포함한 몇몇 신문의 경우 시사만화 하나 하나의 내용을 놓고 보면 틀린 것이 별로 없으나 한달 치 만평, 혹은 1년 치 만평 전체를 놓고 보면 김대중과 여당, 혹은 이회창과 야당이라는 정치의 어느 한 축만 중점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이른바 ‘비판의 편향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전개되고 있는 ‘시사만화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란은 결국 과거보다 한층 성숙된 시사만화가의 윤리 기준이 등장해야 할 필요성을 높이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논의는 적어도 다음의 두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할 것이다.
하나는 시사만화가들이 자발적이며 자유로운 내부 토론의 장을 거쳐 공감대를 확산시켜 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 같은 제의는 크게 두 개로 나뉘어져 있는 시사만화가 단체(한국시사만화가회, 전국시사만화작가회의) 모두에게 유효하다.
두번째는 ‘도를 넘어선 풍자’의 위험성에 대한 논의가 자칫 시사만화가들의 창작의 자유를 일방적으로 위축시키는 것이 돼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시사만화가에게 허용된 ‘표현의 자유’가 사회공동체의 혼란이나 갈등을 초래한다거나 타인의 명예나 인간 존엄에 대한 기본권을 침해한다면 재고돼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시사만화가 스스로의 자발적 이해나 합의도 없이 어떤 기준이 강제돼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은 만큼 집단의 지혜가 요구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