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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꽁트] 그의 '팬'

장재선  2000.11.0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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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선 문화일보 편집부



신지성은 눈발이 푸섬푸섬 흩날리는 인사동 거리를 걸으며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설레는 걸 느꼈다. 신문기자 생활 9년여만에 자칭 '팬'이라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슨 대중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도 아닌데 팬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팬은 커녕 '펜'조차도 노트북을 쓰게 되면서 멀리 한 지 오래 아닌가.



그런데 전화를 걸어온 여성은 컴퓨터 자판을 또박또박 두드리듯이 이렇게 말했었다. " 신지성 기자님 맞죠? 기사를 꼭 챙겨보고 있습니다. 팬이에요. 한 번 만나 뵙고 싶은데요. " 음색으로 보아 30대 초반쯤으로 짐작됐다. 아니면 그 이하일지도 몰랐다. 지성은 얼떨결에 그녀와 만날 약속을 하고, 오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뭐, 이런 일이 다 있을까. 친구 녀석들이 누군가를 시켜 장난을 친 게 아닐까.



그는 카페 '모차르트' 에 들어서자마자 '팬'을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연갈색 가죽 코트를 입은 채로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는 손님은 창가 중앙에 딱 한 사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음성보다도 훨씬 어려 보였다. 가량가량한 얼굴에 눈이 큼지막한 게 뭇 사내들의 시선을 끌만 했다. 서른 다섯 노총각이 새 천년을 열흘 남짓 남겨두고 이런 인연을 만나다니…. 그는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 이렇게 나와주셔서 고마워요. "



그가 맞은 편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자, 그녀는 앉은 채로 악수를 청했다.



" 놀라셨죠? 낯선 사람에게서 전화 받고. 하지만 저는 신기자님이 낯익네요. 신문에서 사진을 봐서겠지만. "



그는 그녀가 '기자의 소리' 같은 데서 얼굴 사진을 봤으리라는 짐작을 했다.



" 저는 신기자님이 문학 기사를 쓸 때부터 팬이었어요. "



" 아, 예 …. "



사회부에서 수습을 마치고 바로 배치 받은 문화부에서 기사를 쓸 땐 신인 투수가 강타자에게 공을 던지듯 늘 조심스럽고 긴장됐었다. 그런데 그 어줍잖은 기사를 챙겨본 독자가 있었다니 뿌듯했다.



그가 주문을 받으러 온 아가씨에게 커피를 시키자,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이후로 정치 관련 기사를 쓰셨잖아요. 저는 그런 쪽에 관심이 없지만 신기자님 기사는 꼭 읽어봤지요. "



" 고맙습니다. 정치부에선 야당 말진으로 늘 헤매기만 했는데…. "



" 요즘엔인터뷰기사를집중적으로 쓰시던데 재미있으신가요? "



생활과학부에서 인물 동정과 인터뷰 기사를 맡게 된 지 1년쯤 되었는데, 사실 편집국 내에서 누구나 기피하는 3D보직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예전 정치부 선배들은 그를 만나면 이런 농담을 던지곤 했다. " 어이, 지성파! 어서 빨리 생과부 벗어야지. " 그런 말속에 숨은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는 맡고 있는 일에 별 불만 없이 지내왔다. 현재 발을 딛고 있는 곳에서 시간의 공을 쌓는다, 라는 것이 그의 좌우명이었다.



" 재미있진 않지만 열심히 하려고 하지요. "



그는 미소를 띠었는데, 뜻밖에 그녀의 안색이 차갑게 변했다.



" 오늘 저는 팬의 자격으로 신기자님께 청구할 게 있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



" …. "



그는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잔을 들어 입을 한 번 축였다. 그녀의 목소리도 싸늘해져서 당혹스런 심정이 됐다.



" 신기자님 기사 때문에 입은 정신적 피해 보상을 청구하려고 뵙자고 했습니다. "



그는 말을 잘못 알아들은 줄 알았다. 팬이라며 만나자고 해놓고, 면찬을 늘어놓더니 느닷없이 뾰족한 칼을 들이밀 줄이야.



" 코스닥에 2억을 투자해 80억을 벌었다는 파리화랑 대표 인터뷰기사를 엊그제 쓰셨지요? 저는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독성 강한 기사를 다른 분도 아닌 신기자님이 쓰시다니. 30대 초반인 그 여자가 화랑을 운영하면서도 밤낮없이 주식을 연구해 그만한 결과를 이루었다고요? 일제 스포츠카를 몰고 주말에 골프장 가는 게 신세대의 라이프 스타일이라고요? 과연 거기에 의문이 없으셨나요? 주식에 투자할 밑천은 그녀가 번 건가요? 그녀처럼 화랑을 차려줄 부모가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실직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하나요? "



그녀는 테크노 춤을 추는 젊은 여자들이 머리칼을 사정없이 흔들어대듯이 말의 칼을 휘둘러댔다. 그 기사는 데스크의 지시에 의해서 쓴 것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그런 변명을 구차하게 늘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그, 그래서 뭘 어쩌라는 겁니까? "



" 저에게 손해배상을 하십시오. "



" 손해배상이요? 오늘 제가 차값을 내면 되겠습니까? "



그는 칼을 비키는 심정으로 눙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칼끝을 내주지 않았다.



" 차값을 누가 내던상관없는일이지요. 정식으로 보상한다는 차원에서 만 원을 제게 주기 바랍니다. "



" 만 원이요? "



" 정신적 피해 보상은 많을수록 좋지만, 상징적인 의미에서 한 달 구독료만 청구하는 겁니다. "



그녀가 너무 정색을 하고 달려들기 때문에 그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 여자는 약간 맛이 간 여자? 그렇게 의심을 하자, 어렸을 때 '미친 년'이라고 놀림을 받던 친구 이모가 기억 속에서 불쑥 튀어 올라왔다. 평소엔 음전한 걸음으로 동네 고샅을 돌아다녔던 그 이모는 아주 가끔씩 동네 아이들 앞에서 치마를 걷어올려서 어른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얼레리 꼴레리, 합창을 하며 놀려댔고, 그녀는 헤실바실 웃음을 머금고 치마 끝을 하늘 높이 쳐들어 박꽃같이 허연 허벅지와 시꺼먼 불거웃을 자랑했었다.



" 머리가 돈 게 아니라면, 그깟 만 원에 집착하는 이유가 뭡니까 ? "



그는 일부러 비아냥거리는 말투를 썼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그 기사를 읽고 돌아버릴 정도로 흥분한 게 사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라도 피해보상을 받아야 하겠어요. "



그는 아까 이곳에 들어설 때의 흥감이 산산조각이 나는 느낌을 받았지만, 어떻게든 그녀를 달래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피해 보상을 먼저 받아야 하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다. 그는 에라 모르겠다, 만 원을 주어버리자, 이런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도 했지만, 그의 속 깊숙이 감춰두고 살아온 꼬깃꼬깃한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30분쯤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집으로 와 버렸다.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속으로 완전히 맛이 간 여자로 치부하고 잊어버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출근해서 한 시간쯤 지나 10시가 되자,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어제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 신기자님! 피해 보상을 해 주세요. "



그는 옆자리의 누구라도 들을 새라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



" 보상을 해 주신다고 해야 만나겠어요. 그러기 전엔 계속 전화를 할겁니다. "



그 쪽에서 무어라고 더 짓까부는 걸 모른 체 중동무이를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인물 동정 기사를 챙기는데, 전처럼 얼음에 박 밀듯이 쭉쭉 나가지 않고 자꾸 멈칫거렸다. 독자가 읽을 때 어떻게 반응을할까,자꾸 생각하게 됐다.



여자는 그 다음날도 10시경에 전화를 했다. 도대체 뭐하는 여자냐고 소리를 빽 질렀지만, 그녀 쪽에선 전혀 기죽은 기색이 없었다.



" 그렇게 궁금하시면 말씀드리지요. 저는 한 문예지의 편집잡니다. 그래서 7,8년 전에 어떤 문학상시상식에서 신기자님을 뵌 적도 있지요. 물론 그 때의 저를 기억 못하시겠지만, 그 때 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은 혹시 모르시겠나요? 소설가에게 책값을 물어달라고 피해보상을 청구했던 독자의 이야기였잖아요? 어쨌든 저에게 만 원을 보상하세요. "



" 당신 완전히 편집증 환자구만. "



이번에도 그가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



왜 그 여자는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할까. 요즘에 언론 문건이니 뭐니 해서 기자들이 사회적 공분의 대상이 되니까, 너도나도 기자를 우습게 보기 시작한 걸까. 그러면 정말 그렇게 꼴사납게 설치는 녀석들을 골라서 괴롭힐 것이지 왜 하필 날까.



생각의 넌출이 뻗다보니, 편집부에서 근무하는 입사동기가 수첩에 끼적거렸다고 하며 그에게 보여준 글귀가 떠올랐다. 제목은 기자. " 바짝 엎드려 기자. 광고주에 기자. 공정거래위에 기자. 권력에 엎드려 기자. 무엇보다도 독자놈들에게 바짝 기자. "



그는 그 글귀를 보고 나서 입사동기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 이렇게 삐뚜룸한 눈으로 무슨 유려한 제목이 나오겠냐. 열린 마음으로 살아라, 임마. "



그런데 자칭 팬이라는 여자에게 시달리다 보니 그 동기의 심정이 헤아려질 것도 같았다. 사진집을 냈다는 전직 장관 인터뷰 기사 하나를 쓰는 데도 신경이 팽팽해졌다. 독자들이 이걸 어떻게 생각할까, 를 헤아리니 잠자리에서도 머리 속으로 가필을 했다. 기자 초년병시절 로 다시 돌아간 듯한 심정이었다.



괴로웠다. 늘어난 지면을 하루하루 메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면 어떤 시러베아들놈이 우리 기자들을 욕할 것인가.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서도 잇새에 이물이 낀 듯한 느낌을 떨치지 못했다. 언론이 사회의 공기란 생각을 과연 나는 지금도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니, 두드러기가 나는 음식을 먹었을 때처럼 속이 매슥매슥해졌다.



다음날 10시경에 여자가 전화하면, 만나자고 해서 만 원을 주어버리자고 다짐했다. 미친 개에게 물린 셈치고 눈 한 번 딱 감자. 그런데 여자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 쪽에서 전화를 하지 않으니까 은근히 기다려지는사람마음의 조화란 뭐란 말인가.



이튿날은 성탄일이자 토요일이어서 신문사가 쉬었지만, 지성은 편집국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서른 다섯 노총각에게 휴일의 여유는 고적감을 가져오지만, 이미 익숙해져 있는 편이었다. 노트북을 켜서 인터넷으로 들어가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르르∼. 텅 빈 편집국의 적막을 깨트리는 벨 소리.



"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



예상대로 그녀였다. 그는 기다렸던 만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에게 항복선언을 했다.



" 만 원을 줄 테니 만납시다. 그리고 이 미친 짓 끝냅시다. "



지성은 카페 모차르트의 중앙 창가 쪽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 '피해 보상을 받아야 할' 당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 약간 머리가 간 여자가 아닐까. 그 여자의 장단에 춤을 추고 있는 나는 얼마나 우스꽝스런 꼴이란 말인가.



그가 자리에서 막 일어나는데, 출입문을 들어선 어떤 남자가 그를 향해 걸어왔다. 키가 훌쩍 커서 다소 말라 보이는 그 남자를 보는 순간 지성은 어, 하고 입을 벌렸다.



" 이국장, 여긴 어쩐 일로…. "



남자는 한때 같은 신문사에 근무했던 이상만 부국장이었다. 나라가 구제금융시대를 맞은 후 신문사에 불어닥친 구조조정의 광풍을 피하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야 했던 분이었다. 지성은 그 때 당사자보다 더 분통을 터트렸지만, 그 이후로 어쩌다보니 한 번도 찾지 못했었다. 신문사에 남은 누구도 그가 무얼 하는지 잘 몰랐고, 다만 고전하고 있다더라, 하는 풍문만 나뒹굴었다.



" 이렇게 만나게 되니 반갑구만. "



상만이 담담하게 악수를 청했지만, 지성은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맞은 편 자리에 앉자마자 상만은 점퍼의 안 주머니에서 파란 색의 편지봉투를 꺼내놓았다.



" 조카애가 어저께사 이야기를 하더만. 자네를 며칠 괴롭혔다구. 내가 자네를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이 편지를 전해달라더군. 궁금할 테니, 먼저 읽어보게. "



지성은 그의 말에 따라 봉투를 열고 그 안의 편지지를 꺼내 읽었다. 붓펜을 이용해 궁서체로 또박또박 쓴 것이었다.







" 저는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고 작은 아버지 댁에서 자랐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기자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 오셨던 바로 이상만씨입니다.



저는 사실 작은 아버지 때문에 신 기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평소 신기자님칭찬을많이 하셨습니다. 조용한 성품이면서 열심히 일하는 후배라고요. 당신 젊었을 때를 보는 것 같다고. 술에 얼큰해 취해 들어오면, 제가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걸 걱정하며 신기자님을 만나게 해 주고 싶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요. 물론 실행에 옮기신 적은 없지만, 그래서 저는 신기자님 기사를 눈여겨보게 됐지요.



실직하신 작은 아버지도 신기자님 기사는 유심히 보시는 것 같았어요. 물론 말씀은 안 하셨지만, 저는 눈치로 알 수 있었지요. 그런데 이번에 그 인터뷰 기사를 읽으시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시더군요. " 요즘 기자들은 기자가 아냐. 그저 기득권 방패막이지. "



그 말씀을 내뱉으시는 표정이 너무 쓸쓸해서 제가 그동안 신기자님께 품고 있었던 애정이 싹 달아나는 걸 느꼈지요. 그래서 궁리 끝에 그런 심한 장난질을 생각해 낸 겁니다.



오늘 제게 주실 피해보상금 만 원으로 우리 작은 아버지께 따끈한 술 한 잔 사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두 분이 모처럼의 회포를 푸시느라 술값이 더 들면 제가 나중에 꼭 갚아드리겠습니다.



그럼, 온당한 것을 그리워하는, 꺼지지 않는 열정을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간직하시길 빌며. "







새 천년을 눈앞에 둔 성탄일에 신지성은 그가 존경했던 선배 이상만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 아닌 또 다른 주님을 밤새 섬기면서, 그의 '팬'을 자청한 여자에게 어떻게 제대로 보상을 해 줄까, 짐짓 행복한 고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