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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 부산 형무소 대량학살 의혹

"우리 힘으로 53년전 과거 복원" 자부심

이학준 기자  2002.04.1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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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준 국민일보 사회부 기자





“우리는 왜 내 민족의 과거사 정리를 AP, BBC 등 외신과 비밀해제된 미국 문서에 의존하는 것일까.”

지난해 10월 아프가니스탄 종군기자 파견은 한국전쟁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됐다. UN구호기와 폭격기가 교차로 하늘을 수놓는 모순은 ‘전쟁이란 비이성적 행태의 조합’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탈레반에서 미국으로 지배자가 교체되는 전쟁에서 아버지는 딸을 팔러 나왔고 난민촌에선 또다른 폭군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귀국을 하고 한동안의 게으름 뒤 BBC의 한국전쟁 보도가 지난 1월 터져 나왔다. 이후 ‘우리 자료와 탐사보도로 한국전쟁에 접근하자’는 목표로 관련 시민단체와 특별법 상정을 추진하는 국회의원실을 돌아다니다 형무소 재소자 집단학살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최근 밝혀진 1950년 9월 부산형무소 재소자 인원일표를 토대로 재소자가 대거 사라졌다는 사실이 일부 드러난 것.

이에 사건팀은 한민수 팀장을 중심으로 수습기자 7명을 포함한 16명의 긴급 특별취재팀을 구성했다. 낮에는 기존 경찰라인 기사를 챙기고 밤에는 특별취재를 하는 90일간의 ‘이중고’는 이렇게 시작됐다.

우선 각종 정보를 취합해 당시 형무소 간수 인터뷰에 극적으로 성공했고 민주당 전갑길 의원실의 도움으로 정보기록보존소에서 부산형무소 명부를 취재개시 30일만에 입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한달간의 취재를 바탕으로 기사를 쓰던 중 사라진 재소자 대부분이 대구형무소로 이송됐음을 알고 기사를 모두 보류하기로 했다.

다시금 한국전쟁과 관련된 논문 10여권 등 각종 자료를 탐독하며 포기와 취재연장을 고민하던 중 유가족의 제보로 대구형무소 명부가 온전하게 있음을 알게 됐다. 이에 사건팀은 ‘이감을 통한 학살’에 초점을 맞추고 취재를 재개했다.

하늘의 도움이 있었을까. 이후 취재는 힘겹긴 했지만 운이 따라 순조롭게 진행됐다. 대구 명부와 대전 명부 등이 속속 들어왔고 국회자료 및 인원일표와 통계표 등도 들어와 최종적으로 모은 기초 자료만 4000장이 넘어서 연속 단독기사 작성이 가능했다. 분석방법은 가장 단순한 명부 대 명부 비교 방식을 채택했다. 4000장이 넘는 자료를 대조해 가며 팀장부터 수습기자까지 모두 연속 밤샘 작업을 한 끝에 ‘이감명목으로 이뤄진 전국적인 형무소 대량 학살’ 팩트가 확인됐다. 연이은 밤샘에 병원을찾기도 했지만 힘겨울 때면 ‘나는 과연 기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생존자와 만날 때면 눈물도 많이 흘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로써 서글픈 53년 전으로의 여행은 마감됐지만 본보의 과거사 정리작업은 계속될 계획이다. 끝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김영한 편집국장과 김수완 사회부장, 이동재 사건 데스크를 비롯한 선배들께 감사를 드린다. 또 일찍부터 한국전쟁에 관심을 쏟고 있는 부산일보 김기진 기자 등 지방지 선배들께도 고개숙여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