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은폐란 없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됐다. 언젠가 진실은 밝혀지리라던 믿음은 지루하기는 했지만 뒤늦게나마 결실을 보았다. 지난 91년 다른 사람의 유서를 대신 써주었다는 ‘누명’을 쓰고 옥고까지 치러야 했던 강기훈씨의 ‘결백’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나온 것이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진은 고 김기설씨의 아버지를 만나 당시 유서가 ‘아들의 글씨가 맞다’는 결정적 증언을 얻어내는 개가를 올렸다. 뒤늦게나마 진실을 말한 김씨 아버지의 용기도 다행이지만, 이를 설득하고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고자 했던 제작진의 노력에 우선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수지 김’사건의 진실이 오랜 시간이 흘러 밝혀진 이후 다시 한번 청량감이 드는 상쾌한 소식이다.
하지만 이같은 진실규명 작업이 기자들이 아닌 다른 이들의 손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는 대목이다. 돌이켜보면 당시 ‘어둠의 세력’ 운운하며 민주화 운동세력을 궁지로 몰아넣는 데 기자들도 한 몫을 했으면서, 이같은 잘못을 조금이나마 만회할 기회를 스스로 놓쳐버린 것은 아닌가하는 자괴감 때문이다. 당시 강씨의 무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들이 제시됐었지만 이같은 목소리에 귀기울인 언론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었다. 돌아보면 강씨를 범인으로 단정짓고 ‘짜맞추기’수사를 한 검찰, 여기에 부도덕한 운동권으로 색을 덧칠한 언론의 행태가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어 낸 셈이다. 여기에다 민주화운동에 생을 바친 집단 전체가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를 당했으니 그 피해는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 언론은 강씨가 유서대필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최소한 강씨가 유서를 대필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강씨에 대해 ‘유서대필 사건으로 논란을 빚은’, ‘재판부의 유죄판결에 국민이 신뢰하지 않는’ 정도의 인물로 남겨 놓았다. 그러는 사이 유서대필 사건을 지휘했던 당시 부장검사는 대법관으로 승승장구했고, 대법관 청문회에서도 강씨 사건에 대해 “정권도 바뀌었는데, 왜 재심청구를 않나?”라고 오히려 반문했다고 한다. 반면에 당사자인 강씨는 이미 씻을 수 없는 상처만 남아 또 한번 여론의 도마위에서 난도질이나 당하지 않을까 잔뜩 주눅든 모양새이다.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은 역사가 무죄를 심판하고 재심법원이 이를따랐다고 한다. 강씨 사건에 대해 우리는 완전히 거꾸로 되어있는 셈이다. 이제 언론은 강씨에 대한 어정쩡한 태도를 버리고 명예회복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그것이 역사의 기록자임을 자처하는 언론의 최소한의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