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시사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지난달 28일 방영분에서 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조작 가능성을 입증하는 새로운 증언들을 보도한 것과 관련, 이 사건에 대한 언론의 재조명 작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당시 언론이 전민련 등 재야단체쪽 증거와 주장은 외면한 채 검찰측 발표내용만을 대대적으로 중계 보도함으로써 강씨의 유서대필 ‘혐의’를 기정사실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과오를 청산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언론의 진실 규명 노력은 재심청구가 기각돼 사법부의 결정을 번복하기는 어렵겠지만 당시 언론 보도로 인해 큰 상처를 입은 강씨 등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도의적 책임인 것은 물론,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한 언론의 기본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지난 91년 5월 당시 언론은 김기설씨 분신 직후 정구영 검찰총장이 분신경위 및 동기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자 당시 서강대 윤 아무개 교무처장의 “분신현장에 누군가 있었다”는 미확인 증언을 사실확인도 거치지 않는 채 보도한 이후 검찰이 제기한 유서 대필설을 중계 보도하는 데 집중했다.
또 검찰이 강기훈씨의 유서대필설을 제기한 것을 계기로 전민련 등 재야단체와 검찰의 증거·증인 공방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당시 언론은 검찰쪽 주장을 앞세우거나 이를 확대 보도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 결과에 대한 보도태도의 경우 유서필적과 김기설씨의 ‘89년 주민등록분실신고 필적’ 등에 대해 국과수가 ‘동이성(同異性) 확인불가’ 판정을 내렸음에도 언론은 검찰의 “다르다”는 주장만을 그대로 인용 보도했다. 이런 언론의 태도는 당시 검찰, 나아가서는 정권 자체의 공신력과 재야의 도덕성 등 어느 한쪽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 특정 견해에 치우쳐 있다는 지적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또 언론은 유서대필설과 관련, 관련자들에 대한 독자적인 확인취재를 통해 진실규명에 접근하려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강기훈씨가 검찰에 자진 출두한 뒤에는 조사과정에서 묵비권을 행사한 것과 관련해 묵비권이 피의자의 권리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강씨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비쳐지게 했다.
결국강기훈씨가 대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은 뒤 사건은 언론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고 기억 속으로 잊혀져 갔지만, 이번 MBC ‘이제는…’에서 보는 것처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의 신뢰성 문제와 검찰의 수사결과, 관련자 증언 등에는 여전히 풀어야 할 의문점이 많은 게 사실이다.
이와 관련 당시 경찰기자 신분으로 유서대필 사건을 취재했던 문화일보의 한 기자는 “검찰 발표에 의존해 유서대필을 기정사실처럼 보도했던 일부 언론의 경우 도덕적인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