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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앞장서 저를 죽였습니다"

[인터뷰] 유서대필 사건 강기훈씨

김동원 기자  2002.05.08 14: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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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외면한 채 검찰발표 중계…여론재판 부추겨





“언론이 먼저 저를 재판했습니다. ‘혐의’가 모두 사실이 돼버렸어요. 언론은 저를 여러 번 죽였습니다.”

지난달 28일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새롭게 조명된 91년 유서대필 사건의 당사자인 강기훈씨. 그는 자신에 대한 당시 언론의 보도태도를 이렇게 말했다.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려 노력하기보다는 검찰 발표만을 중계하며 유서대필을 기정사실화한 언론은 사법부에 앞서 여론재판으로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했다는 것이다.

강씨는 때문에 당시 언론을 “서울지검 강력부의 대변인”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명동성당에서 농성할 당시 만난 취재기자들은 대부분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기사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미 저는 몹쓸 인간이 돼버렸죠. 충격이 너무 커서 나중엔 신문을 보지 않았습니다. 신문을 본 뒤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더라고요. TV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교활해 보이는 표정을 찍을 수 있죠? TV에 나온 제 모습을 보면서 ‘저건 내가 아니다’라고 몇 번씩이고 되뇌었습니다.”

11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당시 언론의 보도태도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가슴에 묻어둔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또 다른 고통처럼 보였다. 강씨는 얘기도중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자주 입에 가져가곤 했다.

그는 “당시 언론이 진짜 진실을 몰랐겠느냐”고 반문하고는 말을 이었다. “알고 있었을 겁니다. 조금만 깊이 있게 취재했다면 금새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언론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 결과를 유일한 증거로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라고 강변했습니다. 여기에 어긋나는 것은 철저하게 외면했고요.”

강씨가 이번 인터뷰를 위한 사진촬영을 끝까지 거부한 것 역시 이런 불신감의 한 반영인 듯했다.

강씨는 ‘직장생활과 대인관계의 어려움’을 이유로 밝혔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범법자’로 낙인찍은 언론에 대한 즉자적인 거부반응처럼 느껴졌다. TV에 비친 자기 모습을 스스로 부인해야 하는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의 ‘사진기피’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문제를 다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지난달 28일 방영분도 며칠이 지난 뒤 “주위에서 자꾸 봤느냐고 물어와서” 인터넷으로 봤다고 했다.그는 ‘이제는…’ 제작팀이 취재과정에서 직장과 가정생활을 카메라에 담겠다는 제안도 사양했다.

그럼 언론은 왜 당시 그런 보도태도를 고집했던 것일까. 강씨의 판단은 이랬다.

“정권의 위기를 운동권의 도덕성 문제로 뒤집으려는데 충실했던 것이지요. 언론은 처음부터 권력과 한편이었거나 아니면 그 어떤 시점에서부터 권력의 편에 서서 움직였습니다. 공범이거나 언론 스스로가 권력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제는…’ 제작진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것은 언론보도에 대한 일반적인 감사와는 좀 달랐다. “제 문제를 다뤄줬기 때문이 아니라 김기설씨 아버님의 증언이나 국내외 필적감정 전문가의 분석 결과를 처음으로 보도하는 등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을 쏟은 것에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언론에 대한 아쉬움이 수그러들지는 않았다.

“솔직히 얘기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면 왜 그 때는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냐는 겁니다. 어쨌든 당시가 더 중요했던 거 아닌가요?”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약간 떨리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건 당사자들도 모두 살아있어요. 언론의 역할이 진실을 알리는 것이라면 때가 더 늦기 전에, 그 사건을 기억하고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을 때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건이 잊혀져 간다면 언제 다시 똑같은 피해자가 나올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아직 언론에겐 말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김동원 기자 won@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