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구독 중인 프랑스의 시사주간지 중에 <폴리티스(Politis)>라는 게 있다. <누벨 옵세르바퇴르>나 <엑스프레스>같은 '메이저'급은 아니지만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좌파 잡지 중의 하나이다. 권력으로부터는 물론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의지도 분명하여 광고를 찾아볼 수 없다. 창간된지 11년 째, 그 동안 순전히 독자들의 호응만으로 운영돼온 셈이다. 그런데 주필인 베르나르 랑글루아에게는 이 잡지의 창간과 관련하여 꽤 흥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하기로 하자.
그는 원래 프랑스의 공영방송에서 오랜 동안 아나운서로 일했던 사람이다. 가장 중요한 저녁 8시 뉴스를 담당했을만큼 능력도 인정받고 있었고 인기도 누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모나코의 공비이며 왕년의 유명한 배우였던 그레이스 켈리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때마침 같은 날에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레바논의 극우 그룹인 팔랑지스트의 우두머리를 암살한 사건도 일어났다. 이스라엘 군대의 방조 아래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학살했던 팔랑지스트들에 대한 복수 테러였다. 저녁 뉴스시간을 앞두고 편집회의가 열렸다. 두 사건 중에 무엇을 '톱'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오고갔지만 대세는 이미 모나코 공비의 죽음 쪽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랑글루아는 이 결정에 완강히 반대했다. "모나코 공비의 죽음은 모나코 공가 이외에는 그 누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반면에, 팔랑지스트에 대한 테러는 수백만의 삶에 영향을 주는 대사건이다." 라고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편집이 끝나고 뉴스가 시작되었다. 막상 랑글루아가 입을 연 첫 뉴스는 테러사건이었다. 편집진과 기술진이 당황했던 것은 물론이고 뉴스 진행은 처음부터 혼란에 빠졌다. 모나코 공비의 자동차 사고 현장 화면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랑글루아는 그 날로 아나운서 생활을 끝냈다. <폴리티스>란 잡지는 그런 일화를 뒤로 하고 생겨났던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랑글루아의 본을 따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생존 문제 해결은 누구에게나중요하고자아실현의 일차 조건이다. <폴리티스>같은 잡지가 살아남을만큼 시민의식이 성장되어 있는 땅도 아니다. 나는 왜곡되고 굴절된 한국의 언론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있는 기자일수록 현장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조직에 비해 기자 각 개인의 힘이 워낙 약하다는 점이며, 따라서 시간이 흘러갈수록 조직 논리에 복속되는 경향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비판적인 기자 정신이 조직이 제공하는 안락한 생존에 안주하고 언론권력에 물들면서 꽃피기도 전에 시들어버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기자들에게 실존적 저항이 요구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예컨대, "사장님, 힘내세요"에서 절망하는 까닭은 그들의 모습에서 조직 논리에 철저히 복속된 모습 뿐만 아니라 전근대적인 주종관계까지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 비판을 통해 사회의 진보를 꾀하고 시민 의식의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전근대성에 매몰돼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내가 장담하건대, 그런 기자일수록 기자임를 내세우며 그 알량한 미시권력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과연 예외적인가? 그렇지 않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기자들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아주 간단하다. 아직 미성숙 단계에 있는 한국사회 현실의 수혜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이를 성숙시키기 위해 한계 상황에서나마 싸울 것인가? 어느 쪽이 소인배의 길이고 어느 쪽이 대인의 길인지 모를만큼 한국의 기자들은 어리석지 않다. '좁은 문'은 보이지 않아서 좁은 문이 아니라 선택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좁은 문인 것이다. 요컨대, 한국의 기자들 개개인이 인간적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할 때에 한국 사회의 진보와 성장도 담보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기자들의 올바른 자아실현은 한국 사회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