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순치돼 진실을 외면해 왔던 일부 보수언론들은 또 다시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대며 진실을 외면한 채 왜곡보도를 일삼으며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지난 89년 5·3 동의대 사건 관련자들의 민주화운동 인정 문제를 놓고 논란이 빚어지자 당시 학생쪽 사건 당사자인 5·3동지회가 지난 8일 성명을 냈다. 언론보도에 강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이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지 10년여가 흐른 지금까지도 사건의 발단과 전개과정, 핵심 쟁점인 화재 원인 등에 대해 여전히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5·3동지회 등 학생쪽 당사자들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의 동의대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민주화 운동 인정 자체를 집중 비판하고 있는 언론보도의 문제점을 대법원 판결문은 물론,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측 입장과 학생쪽 당사자들의 상황 증언 등을 통해 짚어봤다.
발단은 입시부정 뿐이었나
언론은 최근 사설이나 관련 기사에서 동의대 사건이 입시부정이라는 학내 문제에서만 비롯됐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런 언론의 보도태도는 당시 동의대 학생들의 도서관 점거농성이 순수 학내분규로 촉발된 만큼 권위주의 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과는 거리가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그러나 동의대 사건에 대한 재판부의 판결문과 학생쪽 사건 당사자들의 증언을 보면 이같은 학내문제 발단설의 논거가 빈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법원 판결문의 피고인에 대한 범죄사실 인정 부분을 보면, 89년 당시 동의대생들은 “대외적으로는 5·1 노동절을 맞이해 노동자와 학생의 연대투쟁을 전개하여 4월 30일 여의도 노동자대회에 대한 정부당국의 원천봉쇄조치에 항의하고 대내적으로는 종전부터 문제되어온 부정입학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함과 아울러 등록금 부당인상분의 반환을 요구하는 명분을 내걸고” ‘등록금부당인상분 반환 및 세계노동절 100주년 기념 메이데이 총파업동맹휴업 8000 효민인 결의대회’라는 명칭의 5월 1일 교내집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는 이튿날 학생들이 가두시위 도중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도서관 점거농성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단순 학내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5·3동지회 이준경 회장은 “학내문제와 관련한 농성은 사건이 터지기 3주전쯤 이미 푼 상태였고 5월 1일 집회는 전날노동절 기념식 봉쇄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 역시 이같은 동의대생들의 시위 농성의 계기를 받아들여 사건 당사자들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전경 5명은 시위도중 붙잡혔나
언론은 또 학생들이 1일 거리시위 과정에서 당시 부산진경찰서 소속 가야3파출소 소장이 공포탄을 발사한 것에 반발, 2일 항의시위 과정에서 전경 5명을 붙잡아 감금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자세히 살펴봐야 할 대목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일 오후 교문을 진출한 동의대생들이 가야3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지며 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정 아무개란 학생이 붙잡혔고, 학생들이 이에 반발해 다시 파출소를 공격하자 파출소장 김 아무개 경위가 카빈소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했다. 여기서 첫번째 논점은 당시 김 경위가 쏜 카빈소총의 탄환이 공포탄이냐 실탄이냐의 문제다. 학생쪽 사건 당사자들과 당시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김 경위는 20여발의 실탄을 발사한 것으로 돼있고 학생들은 3개의 실탄 탄피를 증거물로 언론에 제시했다. 그러나 경찰과 다른 언론들은 공포탄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이 문제는 당시 경찰이 학생시위에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가늠케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김 경위가 카빈소총으로 위협사격을 했다”고 밝혔으나 탄환이 실탄인지 공포탄이었는지는 명확히 판명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전경 5명이 감금되기까지의 경위와 관련해 대법 판결문에서는 이들 5명의 전경이 진압복이 아닌 사복차림으로 시위대의 주변에 있다가 학생들에게 붙잡혔다고 밝혔으나 언론은 그냥 ‘전경 5명’이라고만 보도해 학생들이 이들을 시위 진압 도중 의도적으로 붙잡았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5·3동지회 이준경 회장은 “당시 사복전경들은 시위대 대열 속에 들어와 있었다. 30분여에 걸쳐 나가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시위주동자들을 검거하기 위해 들어왔다고 보고 그들을 붙잡게 됐다”고 말했다. 법원 판결문과 학생쪽 증언을 종합해 보면 정황상 당시 학생들이 목적의식적으로 전경들을 붙잡으려고 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열람실에 시너 붓고 불질렀나
언론은 최근 동의대 사건을 보도하면서 학생들이 열람실에서 시너를 붓고 불을 질렀다고 단정적으로 보도하고 있지만,판결문을 보면 화재 현장은 열람실이 아닌 7층 복도였으며 시너를 부었다는 기록 대신 석유가 바닥에 뿌려져 있었다고 한다. 경찰 진압 당시 여기에다 윤 아무개 학생이 화염병을 던져 불이 붙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시너냐 석유냐의 문제는 인화성이 다른 점 때문에 화재를 일으키려는 의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럼 화재의 원인은 무엇이었나. 대법 재판부는 “예열된 석유의 유증기에 화염병 불이 옮겨붙어 급속발염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5·3동지회 등 학생쪽 당사자들은 “석유가 급속발염이 일어나기 위해선 섭씨 30도 이상으로 가열돼야 하는데 당시 5월초 새벽 평균기온이 섭씨 7도 정도였던 점을 볼 때 화염병 불꽃으로 수십초 사이에 그같이 온도가 올라가기는 불가능하다”며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런 화재 원인과 관련해선 소화기 분사압력에 의한 불꽃 이동을 내세웠던 1심 재판부의 진단이 이미 한차례 뒤집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그해 9월 치안본부가 야당인 민주당 진상조사단에 “결정적 대형화재는 화염병 투척에 의한 것이 아니라 7층 세미나실 현장에 투입됐던 전경들이 짙은 연기를 피하느라 유리창을 깨면서 외부의 산소가 실내로 유입되는 순간 불씨가 번져 발생했다”는 내용의 ‘화재현장 수사보고서’를 제출해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심의위는 재판부 판결 무시했나
언론은 또 재판부가 사건 관련자들의 행위를 방화치사상 등 중대 범죄행위로 본 것을 시간이 흘렀다고 호의적으로 해석해선 안된다며 마치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재판부의 결정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도했다. 또 언론은 “동의대 사건 당사자들이 민주화 운동 관련자라면 당시 진압도중 사망한 경찰들은 무엇이냐”며 극단적인 이분법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측은 재판부 판결을 무시했다는 지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의위원회 관계자는 “법원의 유죄 판결을 부인하거나 인정자료에서 빼고 심의하지 않았다”며 “위원회의 결정은 법원의 판결문 등 공식자료에 근거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다만, 결정문에서 밝힌대로 “해당자들에게 살인의 고의가 없었음은 물론이고 그런 중대결과가 발생하리라는 것을 확실히 예견할 수 있던 것도 아닌 통상적인 경찰진입을 막기 위한 시위방식에 따라 화염병을 사용한 것”이라는 얘기다.
또 동의대 관련자들의 민주화운동인정이 곧바로 당시 사망한 경찰들에게 문제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언론의 태도에 대해서 삼의위원회 조준희 위원장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 엄청난 생명상실의 피해 정도를 폄하할 의도는 없다”며 “죽은 사람만 피해자고 살아남은 사람은 ‘가해자’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 당시 어둠을 뚫기 위해 노력했던 역사 앞의 젊은이들 모두가 다같은 피해자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