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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위기의 남자

최효찬 기자  2002.05.2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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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찬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위기의 남자’. 요즘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TV 드라마다. 특히 중년 남성이 즐겨 보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불륜의 씬을 파격적으로 보여주는 영상도 화제가 되고 있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시들어 가는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궁상’을 떤다. 회사를 그만두고 현실을 도피하듯 시골로 들어간다. 여기에 불륜이라는 드라마의 단골스토리가 곁들여진다. 옛사랑을 만난 주인공은 무기력해진 자신의 인생을 보상받으려는 듯 돌이킬 수 없는 옛사랑을 ‘복원’하려 한다. 아내는 배신당한다. 그리고 끈적끈적 이어지는 감성적인 배경음악에 깔려 주인공의 인생은 흐느적거린다. 아내에게도 ‘철없는 남자’가 파고든다.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이 당신만 할 수 있는 것인 줄 아느냐’고 독기를 품는다. ‘위기의 남자’에서는 그렇게 한 가정이 흔들려간다. 위기의 남자로 인해 위기의 여자가 되고, 위기의 아이들이 되고, 위기의 가정이 되어간다.

이 드라마에서 위기의 원인은 불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위기는 한 남자의 일상적인 삶의 위기에서 비롯되고 있다. 앞날이 불투명한 생존경쟁 속에서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느끼는 위기, 가정과 직장을 위해 살아가는 동안 어느덧 앙상하게 메말라버린 ‘상실의 자화상’으로 인한 위기가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불륜은 그 상실에 대한 극단적인 보상의 몸짓은 아닐까. 다시 꿈이 있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무모한 욕망은 모든 것을 흐트려놓고 만다.

‘위기의 남자’를 보면서 정작 불륜이나 가정의 위기에 대해서는 위기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위기의 본질보다 불륜의 절제되지 않은 씬을 문제삼는다. 우리 모두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위기에 무덤덤해진 것이다. 하루 자고 나면 정치권력의 비리 문제가 세상을 혼탁하게 하고 있는 요즘이 더 그렇다. 권력핵심부에서부터 정계, 관계, 재계, 심지어 언론계 할 것 없이 비리의 사슬에는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모두가 다 위기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제는 만성적이고 ‘연례적’인 위기 앞에 정작 누구도 위기를 실감하지 않는다. 때로 위기를 초래한 장본인들이 더 큰소리를 친다. 불륜의 주인공이 아내의 불륜에 대해 큰소리를 치는 격이다. 불륜을 합리화하듯 불법을 합리화하려 든다.

위기의 남자, 위기의 직장인, 위기의 주부, 위기의가정, 위기의 대통령, 위기의 한국, 그리고 위기의 언론…. 막다른 불륜에 대한 처방전이 없듯이 위기에 대한 처방전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더 늦기 전에 파격적인 위기의 처방전이 나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