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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교수 특별대담] 남북문제 어떻게 봐야 하나

"마음의 눈에 낀 안개 벗어 던져라"

정구철  2002.07.1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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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치명적 위협은 전쟁 가볍게 생각하는 자들”





기차여행을 할 때마다 의문을 가졌다. ‘왜 통일호는 3등일까’라는. 민족의 하나됨이라는 과제는 그 순서 만큼 우리들의 삶에서 멀어지고 있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서해의 교전과 금강산으로 떠나는 동해의 뱃길에서도 혼란을 느낀다. 대립과 평화, 현실과 희망이 교차하는 분단의 또 하나의 상징이다. 그래서인가. 그 한줄기 물길마저 끊어버리자는 아우성이 천지를 진동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가.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는가.

그것이 리영희 선생을 만나고 싶은 이유였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아야 한다’던 선생의 말을 듣고 싶었다. 진실과 허위의 경계가 무너지던 시기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목소리’를 역설했고 그것을 실천했던 선생에게 지금 우리 사회의 ‘우상’은 무엇인지를 묻고 싶었다.



리영희 선생은 99년 겨울 뇌출혈로 쓰러졌었다. 그 후유증으로 전신마비와 실어 증세를 겪었고 지금도 오른쪽 몸을 쓰지 못한다. 최근 몸이 회복돼 조금씩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렵게 간청해 인터뷰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뜻밖의 상황으로 인터뷰는 순조롭지 않았다. 뇌출혈과 함께 오랫동안 선생을 괴롭혀오던 만성 기관지염이 갑자기 악화된 것이다. 도착한 시간 선생은 병원으로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병세가 완연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아쉬워 결례를 무릅쓰고 한두 가지만 묻겠다고 했고 “멀리서 왔는데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며 선생은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시작한 인터뷰가 1시간 넘게 진행됐다. 대화의 상당 부분은 선생의 기침으로 채워져 있다. 지금도 미안하고 죄송하다.



- 요즘 신문이나 TV는 어느정도 보시는지요.

“신문은 거의 안보고 TV는 뉴스를 3O분 정도 봐요. 오래 보면 금방 머리가 아파서 볼 수가 없어요.”

- 2000년 출간한 비평집 <반세기의 신화> 부제가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인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냉전주의자, 극우 반공주의자, 대미 예속주의자, 군사적 숭배주의자, 평화반대 전쟁 애호자들이 모든 문제에서 옳고 그름을 따질 생각을 하지 않고 몽땅 북한은 악마이고 남한은 천사라고 하고 있어. 남에도 그런 사람이 많지만 미국 부시 대통령도 대표적인 사람이고.”

이와 관련해 선생은 “북의 일방적 위법성과 책임을주장하고 싶거나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눈에 낀 안개를 벗어버릴 자료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99년 발표한 ‘북방 한계선은 합법적 군사분계선인가’에서 제시한 53년 7월 27일부터 98년 6월말까지의 남북의 ‘정전협정 위반 현황’ 통계였다. 이에 따르면 북의 위반건수는 42만여건, 북측이 남측과 유엔사가 위반했다고 주장하는 휴전협정 위반이 45만여건으로 서로 ‘막상막하’라는 것이다.

“휴전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전부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이야. 남한은 총 한번 안 쏘고 한번도 협정을 위반한 적이 없는 것처럼 했어. 기자들이 앞장서서 그렇게 해왔어. 화재가 났고 몇 명 죽었는데 원인이 뭔지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고차적인 진실에 눈을 떠야 돼. 기자들은 먼저 합리적 의심을 해야 돼. 뭐든지 북한이 나쁘다는 이런 고정관념에서 자기 스스로 해방되는 이성적이고 냉정한 객관주의적 태도가 있어야 해.”

화제는 자연스럽게 이번 서해교전의 원인인 북방한계선 문제로 이어졌다.

“북방한계선을 영해, 영토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중대한 착각이야. 정전협정 합의 규정에 근거하지 않은 일방적 조치라고 봐야 해요. 당시 한국군 작전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엔사령관의 내부적 작전 운용 규정의 성격이라고 보는 게 옳아요.”

북한이 40년간 북방한계선을 묵시적으로 인정해 왔다는 주장이 있다고 묻자 선생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56년 이후 매년 수없이 반복돼온 북한의 ‘북방한계선 침범’이 우리에게는 ‘도발’이지만 반대로 해석하면 북이 행동으로서, 북방한계선 주장에 주체적 행위로서 이의제기를 거듭해온 ‘실적’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평화적 해결의 방법을 찾지 않고 ‘영해’ 문제로 몰고 간다면 분쟁의 영속화 밖에 미래가 없어. 전쟁하자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무책임한 범죄행위야.”

선생은 전쟁 군사력 위주의 해결방식과 그것에 동조하는 언론의 ‘흑백논리적 접근 방식’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악화된 기관지염으로 힘겹고 느릿하게 이어가던 어조도 높아졌다. 옆에 있던 부인 윤영자 여사가 “화내지 마세요”라고 걱정할 정도였다.

“무슨 일이 터지면 공포분위기를 만들고 그렇게 해서 맹목적 광신적 애국심을 부추기고 비논리적 비이성적 적대감과 적개심을 조장해서 문제를 다루어 나가니 그 결과가 어떻게되겠어. 저널리스트들도 건전한 비판의식이 결여돼 있어요. 편집국장 논설위원 등 높은 사람부터 말단 평기자까지 이런 문제에 대해 객관적인 사고를 못하는 것 같아요. 정상적인 ‘사실 인식’에 근거해서 측량하지 않아요. 북을 비판하고 모욕하는 것으로 애국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선생은 이들을 ‘자칭 애국자’ ‘독점적 애국자’라고 불렀다)의 ‘주술’에서 기자들이 빠져 나와야 돼요.”

여기서 선생은 “남북충돌의 성격과 본질에 관해 ‘일전불사론자’들은 자신의 논문 ‘북방한계선은 합법적 분계선인가’(반세기의 신화, 삼인출판사 1999. 83∼131쪽)를 읽고 좀 공부하기를 권한다”고 말했다.

- 대북 포용정책, 이른바 ‘햇볕정책’에 대한 논란이 뜨겁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수십년 동안 전쟁을 하고 있어. 그 이유가 카슈미르를 둘러싼 영토분쟁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분쟁도 그렇고. 팔레스타인에서 뺏은 땅을 내것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보전하려고 한다면 테러는 그치지 않을 거야. 영원한 전쟁이야. 그래서는 안돼. 적대관계의 원인이 되는 사실에 대해 그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규정하면서 평화의 길을 찾아야 해.”

카슈미르 분쟁, 중동 사태를 얘기하는 선생의 말엔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주제는 다시 우리사회로 돌아왔다. “전쟁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 그것은 위험한 발상이야. 지난 50여년 동안 그런 군사문화적 사상에 젖은 사람들이 지금도 한국사회 여러 분야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대한민국의 ‘치명적 위험’이지.”

“햇볕정책은 화해정책, 공존정책이라고 생각해. 두 적대하는 세력 사이에서 해결 가능한 방법을 찾아내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봐요. 그런 의지가 있고 그것을 실행한다는 점에서 절반의 해결은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있어. 정책 수행 과정에 있어서 비판받을 점이나 시정해야 할 것은 물론 있겠지. 그러나 남북간의 기본정책으로서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것을 정당의 정략이나 일시적 권력투쟁의 방편으로서 파기하고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햇볕정책의 가장 중요한 점은 전쟁의 가능성을 회피한다는 것인데 그것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이 안돼.”

- 칼럼 등 여러 글에서 ‘미국 사대주의’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남북 관계의 주요 변수인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어떤 시각으로봐야 하는지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좋게 말하면 오해하고 있어요. 사실대로 말하면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식민지적 근성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죠. 미국이란 나라는 박애주의 국가도 아니고 인권옹호 사회도 아닙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동맹국가의 이익은 무시하거나 도외시하는 나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미수호조약을 맺고 몇해 지나지 않아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우리 나라를 일본에 넘겨버렸어요. 일본이 보호조약을 체결하자 맨 처음 보따리를 싸서 떠나버린 나라가 미국이야. 얼마전 여중생 두명이 미군 장갑차에 압사했을 때도 미국 숭배적인 소위 거대 신문들은 1단 내지 2단으로 밖에 다루지 않았어. 바로 이런 신문들이 미국 이익을 위해 민족간 전쟁을 부추기는거요. 어느 나라 누구를 위한 신문인지 모르겠어요. 미국이 도와주지 않으면 큰 일 날것으로 생각하는 자기 무력증, 자기 부정에 찌들어 있는 국민적 정신상태가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것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돼요.”

- 98년에 북한을 다녀오셨던가요. 어떻게 보셨습니까. 89년 한겨레 논설고문 시절 북한방문 취재를 계획했다가 “북한으로의 잠입 탈출을 모의했다”고 해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신 적이 있는데 감회가 남다르셨을 것 같은데요.

“형님과 누님 생존 여부를 알기 위해 갔는데 두분 다 돌아 가셨더라고. 작은 누님은 내가 가기 5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5년 전에 갔으면 만나봤을 텐데. 북한은 굉장히 많이 변화하지 않으면 건전히 국가적 생존을 유지하기 어려운 나라라고 봤어. 나는 남한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보는 만큼 북한도 똑같은 잣대로 판단하려고 노력해. 평생을 민족의 화해를 생각하고 글을 써 온 나 같은 사람도 호텔 밖을 돌아다니는 것을 막더라고. 돌아오기 전 만찬을 하면서 북한 고위 관리들에게 대담한 정치적 전환과 수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어.”

선생은 “나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며 웃었다. “북한 사람들은 재미나는게 자기들이 잘한다고 해야 좋아해. 그런데 쓴소리만 잔뜩 하니 좋아하겠어.”

선생의 잦은 기침과 옆에서 근심스럽게 지켜보는 윤영자 여사의 모습에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병원에 갈 시간도 한참 지난 것 같아서 예의가 아니다 싶어 일어서려고 하는데 선생은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물어볼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한다.조심스럽게 언론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 ‘언론’ ‘언론기관’ ‘언론인’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모든 낱말에는 역사성 사회성이 있어. 처음에는 없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역사적 함축’이 들어간 것이지. 일제 강점기 민족독립운동과 오랜 반독재 투쟁을 통해 언론이라는 낱말에도 그런 역사적 함축이 있어요. 옳은 일을 위해서 잘못된 것을 비판하고 그것에 항거하는 그런 의미가 담기게 된 것이지. 지금의 보도기관에 대해서 ‘언론’이니 그런 말을 쓰는 게 주저스럽다는 말이야.”

- 한겨레신문이 요즘 고민이 많아 보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이해할 만 합니다. 창간 때에 비해 상황과 조건이 달라졌고 위상과 역할에 대한 요구도 변했을 것이고. 나도 탄생에 조력한 사람이지만 그때는 한겨레가 유일한 양심적, 그리고 민족간에 화해를 추구하는 신문이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작은 한겨레’가 많이 생겼어. NGO나 풀뿌리에 기초한 지역신문, 진보적 좌파언론, 막강한 노동조합언론, 게다가 활기넘치는 진보적 잡지언론들, 거기에 인터넷 매체까지,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겨레의 역할은 작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다 한겨레로부터 힘을 얻은 것이라고 봐야죠. 특별한 대안이 어디 있겠어요. 고민을 멈추지 않는 자세만 있다면 방법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조선일보에도 몇 년간 몸담으셨는데요. 요즘 조선일보와 관련된 논란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요즘 신문을 안 보니까 조선일보가 어떻게 쓰는지 정확하게 몰라. 간접적으로 전해 듣고는 있지만 직접적인 나의 지식이 아닌 것을 갖고 발언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 굳이 한마디 한다면 민족의 생존 안위가 걸린 문제들에서 전쟁 애호적인 방향, 민족간 증오심과 적개심을 부추기는 태도는 언론의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해.”

- ‘요즘 기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첫째는 공부를 많이 해 달라고 하고 싶어. 내가 취재하는 분야에서 바라건대 그 분야의 권위자나 전문가의 절반이면 좋겠지만 최소한 3분의 1 수준은 알아야 해. 술만 먹지 말고. 두 번째는 자기가 속한 회사가 어떤 노선과 철학으로 만드는지, 독자들의 정신 사상적 지향을 어떻게 올바르게 끌고 가고 있는가에 대해 사내에서의 ‘비판적 역할’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것이야. 자기 신문이 역사적 과오, 국민적 과오를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월급 많은 것에 만족하거나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것에 우쭐해 하면서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세 번째는 가난하게 살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야. 과거의 우리 세대처럼 살라는 뜻은 아니야. 물질적 풍요에 흥청대고 누리면서 그것에 젖어버리면 정신적 긴장이나 직업적 윤리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지.”

인터뷰를 끝내고 선생은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지팡이를 짚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그 뒷모습이 너무도 크고 무겁게 다가왔다.



대담·정리=정구철 편집국장





리영희 교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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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 평안북도 운산군 대관면에서 태어나 50년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한 뒤 경북 안동공립중학교 영어교사로 근무 중 6·25 전쟁이 나자 그 해 7월 육군 ‘유엔군 연락장교단’에 입대해 7년간 복무했다.

57년부터 64년까지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를 지내다가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외신부장을 역임했다. 69년 조선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뒤 70년 다시 합동통신으로 옮겨 외신부장으로 재직 중 박정희 정부의 압력으로 퇴사했다.

72년부터 한양대 문리대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다 76년 해직, 80년 3월 복직했으나 그 해 여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됐다.

87년 미국 버클리 대학 초빙교수, 88년 한겨레신문 이사겸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9번 연행돼 5차례의 구속과 3번의 수감생활로 총 1012일의 수형 생활을 치뤘다. 언론사에서 2차례 강제퇴직했고, 교수직에서 2번 해직되는 등 우리 시대 대표적 비판적 지성으로 파란의 삶을 살았다.

95년 한양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한 뒤 현재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에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분단을 넘어서> <베트남 전쟁>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스핑크스의 코> <반세기의 신화> 등이 있으며 편저 편역서로 <10억인의 나라> <8억인과의 대화> <중국백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