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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기념사] 역사와 국민, 진실 앞에 겸손할 때입니다

이상기 회장  2002.08.14 14:2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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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군사정권의 반민주 악법인 언론윤리위원회법 추진에 맞서 언론자유 수호의 기치를 내걸고 1964년 태동한 한국기자협회가 어느새 불혹에 가까운 연륜을 쌓게 됐습니다.

기자협회 38년 역사가 순탄치만은 않았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입니다. 자유언론을 향한 선배들의 투쟁은 간단없이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1971년 ‘자유언론 수호를 위한 행동강령’ 제정을 시작으로 1973년 ‘언론자유 수호결의’ 1974년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잇따라 채택하며 정권의 언론탄압에 분연히 맞섰습니다.

80년대 90년대에도 선배들의 기자혼은 살아 꿈틀거리며 이땅의 언론사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신군부세력의 사전검열에 분연히 맞서 제작을 거부하는가 하면, 수십년간 관행화한 촌지 거부운동을 폄으로써 기자사회 자정에 앞장섰습니다. 이같은 선배들의 올곧은 정신은 기자사회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화, 개혁하며 시대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1~2년새, 의욕이 앞서면서 시행착오와 일부 부정적인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언론사간 반목과 질시, 쟁송 등은 일찌기 한국언론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물론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은 기자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입니다. 하지만 최근 언론사간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실체적 진실을 가리기보다 이념을 앞세운 저열한 자사이기주의에 다름 아닌 경우도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결국 국민들의 언론 불신만 초래할 뿐입니다. 조중동이니 한경대니 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언론발전에 결코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자들간의 ‘배타적인 결속’이 아니라 상호이해와 연대입니다.

진실 추적을 게을리하는 것 역시 요즘 언론의 문제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의혹만 난무한 채 실체는 오리무중인 보도양태로는 국민들에게 믿음을 줄 수 없습니다. 시작만 있을 뿐 끝이 없다는 비아냥이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심지어 독재정권 시절의 `카더라 통신’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비난마저 일고 있습니다. 역사와 국민, 그리고 진실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자세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자사회 만큼 양심과 양식을 갖고 역사와 현실을 냉철히 꿰뚫어보며,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는 집단이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절대 다수의기자들은 이같은 사명을 다하기 위해 오늘도 분투하고 있습니다.

2002년 하반기, 아시아 경기대회와 대통령 선거라는 두가지 중요한 국가대사를 앞두고 우리 기자들 역할이 막중함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때마침 북한이 참석하기로 돼 있는 아시아 대회 보도는 냉전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남북화해와 통일을 지향하는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가 돼야 합니다. 또 역대로 불공정 시비가 끊이지 않은 대선 보도와 달리 이번에는 반드시 공정보도, 객관보도를 이뤄내야 하는 시대적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지방과 중앙, 메이저와 마이너 매체가 공정한 경쟁을 통해 균등하게 발전할 여건을 마련하는 것 또한 우리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정보와 여론을 독과점하려는 일부 언론의 전도된 가치관을 더이상 방치해선 곤란합니다. 서로 다른 매체들이 제각기 특화된 목소리를 내며 국민의 선택을 기다리는 게 더 이상 딴나라 얘기가 돼선 안됩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기자들은 소속사 이해와 이념에 따라 기사를 작성하며, `대한민국 기자정신’을 곧잘 잊고 지내는 듯 합니다. 10년 20년 뒤 우리의 사랑스런 후배들에게 자랑스런 기자정신을 넘겨주는 것은 지금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38년전 기협 창립 당시 선배들이 제정한 `한국기자협회 강령’은 기자의 역할이 어때야 하는지 새삼 깨닫게 해줍니다.

“조국의 민주발전과 언론인의 자질향상을 위해 힘쓴다/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여하한 압제에도 뭉쳐싸운다/ 서로의 친목과 권익옹호를 위해 힘을 합친다/ 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족동질성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국제언론인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서로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