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밤 방영된 MBC 특집다큐멘터리 ‘만경봉호가 남긴 것’은 ‘아침은 빛나라’로 시작되는 북한 국가와 함께 인공기가 게양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난 1일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여자 유도 부문 금메달을 수상한 리성희 선수의 시상식 장면이다. 카메라는 한반도기를 들고 인공기를 향해 기립해있는 남측 관중들의 모습과 국가를 따라 부르는 북측 응원단의 숙연한 모습을 차례로 비추고 있다.
TV를 통해 이같은 장면을 보는 것은 불과 한 달 전 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만해도 언론에선 “남한 땅에서 북한 국가가 울려 퍼지고 인공기가 게양될 경우 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 조선일보는 “순수한 스포츠행사가 정치 선동·선전장으로 악용될 위험성이 없지 않고, 남북 또는 남남갈등의 새로운 불씨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고, 동아일보는 “북한은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며 이적단체에 대한 찬양 고무 행위는 중대한 범죄”라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시안게임이 무르익으면서 TV와 신문, 인터넷 매체를 통해 인공기는 사실상 모든 국민에게 노출됐다. 지난 13일 북의 함봉실 선수가 여자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자 대부분의 방송은 메인 뉴스에서 시상식 장면을 내보내며 북한 국가를 배경으로 인공기가 게양되는 모습을 방송했다. 당초 북한 국가가 전파를 타는 것에 대한 우려 때문에 시상식 중계 여부를 놓고 고민했던 방송사들은 “정작 다른 경기를 바로 중계해야 하는 시간적 제약 때문에 시상식 중계를 하지는 못했지만 뉴스를 통해 짧게나마 보도했다”고 말했다. 신문에서도 역시 최대 화제가 됐던 북측 응원단에 카메라 앵글을 맞추며 그들이 인공기를 흔드는 모습을 지면에 여러 차례 게재했다.
그러나 언론에서 우려했던 것처럼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나 ‘거부감’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북의 국기와 국가를 인정하면서 남북이 비로소 하나된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이미 우리 국민은 스포츠와 정치를 구분할 만큼 성숙해 있었던 것이다. 실제 아시안게임에 앞서 문화일보가 TN소프레스와 함께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북한 응원단과 남한의 북한 서포터스가 경기장에서 북한 인공기를 들고 응원하는 것’에 대해66.6%가 ‘비정치적 행사인 만큼 상관없다’고 답변한 바 있다. 어쩌면 ‘사회적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언론의 우려는 국민들의 의식수준도 따라가지 못하는 기우였을런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국민대 언론학과 이창현 교수는 “현 정부는 북에 개방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상황에 따라 문제가 될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며 “국가보안법 등 관련법을 제도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