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치사사건을 다룬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은 언론의 사명과 힘이 무엇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아마 그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광화문을 가득 채우는 촛불의 물결도 없었을 것이다. 광화문을 수놓은 촛불을 보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닌 높은 정의감이 새삼 놀라웠다. 일단 진실을 알기만 하면 진실의 편에 서는 사람들, 그것이 대다수 우리나라 사람의 특징이다. 언론의 임무는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사실과 진실, 이 두 단어는 언론의 알파이며 오메가다.
지난 대선 기간동안 언론을 접하면서 자주 사실과 진실의 거리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실보도에 있어서 언론이 많이 좋아진 것이 ‘사실’이다. 발행부수가 많은 신문들의 불공정과 편파보도가 여전했지만 옛날에 비교하면 조족지혈이었고 주요 TV의 보도태도는 공정성에 거의 근접했다. 그러나 진실보도에 있어서는 너무 아쉬웠다. 특히 정치관련 보도에 있어서 말하는 자들의 말을 그대로 옮겨주는 사실보도는 진실보도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실보도가 아닌 왜곡보도가 되기 쉽다. 정치인들이 국민들에게 하는 말의 태반은 거짓이거나 내세운 명분과 다른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다. 되어진 말이 아니라 그 말이 태어난 지점과 동기가 더욱 중요하다. 권력의 달콤한 맛을 잃는 것이 두려워 부나방처럼 나대는 자들과 사적 희망을 대의보다 앞세우는 김민석이 말한 ‘후보단일화’와 모든 손해를 자신이 감수하며 수구세력의 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후보단일화’를 밀고 나간 김근태의 말은 결코 같은 것일 수 없다.
이번 선거의 결과는 노무현의 승리와 이회창의 패배, 권영길의 선전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승자와 패자가 있다. 김근태와 정형근, 단병호가 바로 그들이다. 김근태는 낡은 정치의 틀을 부수는 출발점이 된 국민경선제를 처음으로 주장하여 현실화시키고,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정치자금을 고백하여 새로운 정치적 시도를 희화화하려는 컴컴한 보스정치 세력으로부터 국민경선제를 방어해냈다. 새로운 정치를 위한 그의 투쟁은 늪에 빠진 민주당을 구원해냈지만 김근태 개인에게 돌아간 결과는 참담했다. 검찰이 김근태에게 마련해준 자리는 법정의 피고인석이었고, 그의 바보같은 행동은 계속되었다. 후보 단일화. 그것은 실패할 경우 얻어먹을 것이 욕밖에 없고, 당시로서는 성공할가능성도 극히 희박했지만 성공하는 경우에조차 뒷줄로 밀려나야 하는, 김근태 개인에게 어떤 경우에도 이익이 되지 않는 노선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이 당선될 수 있는 길은 그 길 이외에 달리 없었다. 결과적으로 노무현의 승리는 김근태 노선의 승리였지만 예견됐던 대로 노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민주당사를 비춘 카메라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김근태의 자리는 가장 구석이었다.
정형근의 노선은 선거를 처음부터 끝까지 공작과 음모, 흑색선전전으로 끌고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러한 노선의 기획자였고, 그 기획의 실행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 생산하는 전문가였다. 이회창의 선거전략은 그 알량한 정보와 공작에 의존하였고, 한나라당은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추었다. 문제는 다수의 국민들이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추기를 거절했다는 데 있다. 정보정치의 냄새가 진동하는 이회창의 선거전략은 고문과 공작정치의 끔찍한 시대를 통과해온 30, 40대의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게 만들었고, 민주화를 쟁취한 80년대 이후의 열린 시대를 살아온 20대의 머리에 쥐가 나게 만들었다. 이회창의 패배는 반북대결의 시대를 복원하려는 정형근식 낡은 정치의 패배였다. 이후보가 정계를 은퇴한다면 그보다 앞서서 정계를 은퇴해야 할 사람이 정형근일텐데, 이후보의 정계은퇴 기자회견장을 비춘 카메라에는 그의 얼굴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지난 대선기간 동안 1천여명의 노동운동가들은 권영길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는 엽서를 한 장씩 받았다. 발신지는 군포우체국 사서함 20호였다. 발신인은 수인번호 77번, 단병호였다. 그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87년 이래로 이 나라를 지배한 정권 중에서 그를 잡아 가두지 않은 정권이 없었다. 노태우, 김영삼 정권에 이어서 김대중 정권이 끝나가는 지금도 그는 감옥에 가 있다. 군포우체국 사서함 20호, 그의 주소지가 서울구치소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노동자들이 권영길에게 투표해야하는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언 손으로 또박또박 적어간 그의 편지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세 후보의 운명을 규정해온 김근태와 정형근, 단병호가 지금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그들의 생각을 읽으면 민주당과 한나라당, 민주노동당의 노선을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이 그 정당 안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어떤 것인지를 확인해보면 그 정당의 미래를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을 중계하는 언론이 아니라 국민이 알아야 할 진실을 알리는 언론의 역할이 더욱 절실한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