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접하는 언론매체를 통해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모습을 그리고 평가한다.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은 많은 부분 내가 접하는 언론매체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너와 내가 접하는 언론매체가 확연히 다르다면 너와 내가 그리고 있는 현실의 모습은 그만큼 다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객관적이고 고정된 하나의 현실은 없다.
나에게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 이 창의 각도는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얼마 전 아침 신문을 펼치다 문득 든 생각이다. ‘인수위, 재벌 길들이기’ 뭐 그런 제목이 눈에 들어왔을 때였다. 재벌 길들이기라고? 순간 뭔가 찜찜했다. 이게 아닐텐데….
다 알다시피 새 정부는 재벌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그와 관련된 일을 ‘길들이기’라고 표현하니 뉘앙스가 전혀 달랐다. 개혁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사라지고 단순히 힘 겨루기만 남았기 때문이다.
언론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는 문제되는 사안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언론 스스로가 자기 나름의 ‘시비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누가 누구와 대립하고 있고 어떻게 힘 겨루기를 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권력의 눈’으로 사안을 봐서는 결코 제대로 시비를 가릴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신문들은 구체적 쟁점을 가지고 시비를 가리기보다는 누가 누구와 어떻게 권력 게임을 하고 있는가 하는 관점을 즐겨 취하는 것 같다. 최근에만 해도 ‘검찰 길들이기’ ‘공무원 길들이기’ ‘언론 길들이기’ 등의 표현이 지면에 계속 등장했다.
뿐만 아니다. 개혁파 의원들의 정당 개혁 움직임도 개혁의 관점에서보다는 당권 싸움으로 보도하는 경향이 일부 신문에서 두드러졌다. 개혁을 위한 움직임을 길들이기나 권력다툼의 시각으로 보도하면 개혁이 가지는 윤리적 당위성이 일거에 무너지면서 그 뿌리가 흔들리고 만다.
그때 독자에게 남는 것은 냉소뿐이다. 독자는 신문을 보고 시비를 구분해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싸움의 구경꾼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자연히 개혁을 밑받침할 국민적 참여와 지지는 약화된다. 개혁의 대상이 되는 세력들이 흔히 개혁의 움직임을 권력 싸움으로 돌려버리는 소이일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는 안 되는 신문까지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건 왜일까?
이해관계에 따른 의도성도 크겠지만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 스스로도 권력의 시각에 지나치게 길들여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일차적 관심은 우리사회의 권력자들과 권력기관들이다. 그리고 경마식 선거보도가 보여주듯 누가 일등을 하고 승리하는가이다.
최근 대통령직 인수위와 관련해 ‘작문’들이 난무한 것은 인수위가 기사거리를 제공하는데 인색한 탓도 있겠지만 ‘새로운 권력의 핵’ 인수위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지나치게 컸던 데도 있지 않았을까? 어느 신문의 요구대로 인수위가 조용히 정책인수를 할 수 있도록 하려면 언론의 취재활동도 ‘과열’돼서는 안되는 게 아닐까?
언론이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시비의 눈으로 세상을 보여주면 사회는 보다 차분해지고 성숙해진다. 쟁점들을 구체적으로 따지고 토론하면서 발전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을 권력의 눈으로 보여주면 사회는 항상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힘 겨루기를 통한 대결과 갈등이 결과하는 것은 우리 언론에 흔히 보도되듯 극한 대립과 정면충돌 같은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