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은 기자 2023.02.27 19:38:27
한겨레신문이 석진환 전 신문총괄과 대장동 의혹 핵심 인물인 김만배씨가 돈거래 한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보고서 ‘한겨레 윤리는 어디에서 실패했나’를 27일 공개했다. 지난 1월11일 한겨레가 구성한 ‘편집국 간부의 김만배 사건 관련 진상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가 활동을 시작한지 50여일 만이다. 진상조사위는 김민정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를 위원장으로 외부 위원 4명, 내부 위원 9명 등 모두 13명이 참여했다.
한겨레는 80쪽 분량의 진상보고서 전문을 담은 PDF 파일을 자사 웹사이트에 게시했다. 27일자 1면과 2~3면 전체를 할애해 보고서 내용을 요약해 싣기도 했다. 이날 한겨레는 보고서 공개를 알린 <윤리의식 바로잡고 쇄신하겠습니다> 기사에서 “진상조사 결과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독자·주주·국민들께 다시 한 번 깊은 사과와 함께 다짐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제기된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겠다”며 “한 번의 보여주기 식으로 해결하지 않고 치열한 논의를 통해 고통스럽더라도 단단하게 변하겠다는 다짐을 한다”고 했다.
사내외 인사 52명 조사, 대장동 사건 보도 712건 전수조사
진상조사위는 석진환 전 신문총괄 대면조사를 포함해 사내외 인사 52명에 대한 대면 또는 서면·전화 조사를 실시했다. 보고서에는 석진환 전 신문총괄·김만배씨·전 사회부장·전현직 법조팀장 등이 조사에서 밝힌 진술 내용이 담겨있다.
또 진상조사위는 석 전 신문총괄과 사전에 돈거래 사실을 알았지만 묵인했던 전 사회부장이 쓴 기사·칼럼을 살펴보고, 2021년 9월1일부터 올해 1월5일까지 한겨레의 대장동 사건 관련 기사와 집배신 시스템 내 기사 등록 및 수정 이력, 보고 내용 등을 검토했다. 돈거래가 한겨레 대장동 사건 보도에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차용증·담보 없는 돈거래, ‘사인 간 정상적 거래’로 보기 힘들어
진상조사위는 석 전 총괄과 김만배씨 사이의 금전거래가 정상적인 관례를 크게 벗어난다는 판단을 내렸다. 두 사람은 9억원이라는 거액을 빌리면서 차용증을 쓰지 않았고, 이자도 뚜렷하게 약속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진상조사위는 두 사람의 진술 이외에는 문자내역 등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이야기가 오갔는지를 판단할 근거자료가 전무해 금전거래의 대가로 어떤 부탁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파악할 수 없었다고 조사 한계를 밝히기도 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03~2004년 무렵 처음 알게 석 전 총괄과 김씨는 2017년 3월부터 각각 한겨레와 머니투데이 법조팀장으로 대법원 기자실에서 함께 지냈다. 이후 1년에 두 차례 가량 함께 골프를 쳤고, 석 전 총괄이 법조팀을 떠난 뒤에도 1~2개월에 한 번씩 만날 정도로 친분관계를 이어왔다.
석 전 총괄이 2019년 3월 아파트 청약의 어려움을 김씨에게 얘기하자, 김씨는 “돈을 빌려줄 테니 청약을 해보라”고 제안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석 전 총괄은 2019년 5월 수표로 3억원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2020년 8월까지 총 5차례에 걸쳐 9억원(선이자 1000만원 포함)을 수표로 받았다. 김씨로부터 받은 9억원과 금융기관 대출, 기존 주택 보증금 등을 합쳐 2021년 8월 아파트 분양대금을 모두 치른 석 전 총괄은 남은 돈 2억원을 김씨에게 갚았다.
석 전 총괄은 조사위에 “입주 시 전세를 놓고 전세보증금을 받아 빌린 돈을 모두 갚을 계획”이었다면서 “그러나 ‘자녀 학업을 마친 뒤 천천히 갚으라’는 김씨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선 입주하고 변제할 시기를 늦췄다”고 진술했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거래 금액 9억원 중 6억원은 또 다른 ‘대장동 의혹’ 핵심 인물인 남욱 변호사와 정영학 회계사가 제공했다는 점에 대해 석 전 총괄은 조사에서 “돈을 빌릴 당시 유산을 받아 평소 돈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던 김씨가 친분 관계로 자신에게 돈을 빌려준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씨도 진상조사위 서면조사에서 “돈의 출처를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석 기자는 당연히 제 돈을 빌려주는 것으로 알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상조사위는 “두 사람 모두 ‘어떠한 부탁이나 요청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고 밝히면서도 상궤를 벗어나는 거액의 돈거래를 하면서 출처나 의도에 대한 의심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라고 판단했다.
진상조사위는 보고서에서 “돈거래가 있기 전에도 그는 김씨로부터 골프, 식사 등의 대접을 꾸준히 받아왔다. 결과적으로 돈거래까지 이어지게 된 출발점이 됐다”며 “김씨와의 비정상적 거래를 통해 상당한 금전적 이익을 추구한 그의 행위는 금품수수를 금지하는 한겨레 윤리강령 실천요강 및 취재보도준칙 위반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어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이 언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공개되기 시작한 2021년 9월 석 전 총괄이 해당 직을 맡아 실질적인 이해충돌 상황이 발생하게 됐는데도 이를 회사에 보고하거나 직책에서 물러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며 “이는 이해충돌 회피 의무를 규정한 한겨레 취재보도준칙 위반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돈거래 인지한 전 사회부장, 별도 취재 지시 등 조치 취하지 않아
진상조사위는 이번 조사에서 전 사회부장을 주요 관련자로 지목했다. “지난 1월 자신의 돈거래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석 전 총괄이 미리 이 사실을 얘기한 사람은 사회부장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5일 남욱 변호사의 피의자 신문조서를 토대로 “김만배가 기자 집 사준다며 돈 요구해 6억원을 전달했다”는 동아일보 보도가 나오자 석 전 총괄은 이날 당시 사회부장에게 기사에 나오는 ‘언론사 간부’가 본인이라며 금전거래 사실을 알린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부장은 두 사람의 돈거래 사실을 듣고도 회사에 별다른 보고를 하지 않았다. 당시 사회부장은 그 자리에서 “차용증이 있느냐”, “이자는 어떻게 되냐”는 점 등을 물었고 “(차용증이) 있다”, “시중은행 이자 정도”라는 답을 들었다고 조사에서 말했다.
석 전 총괄은 진상조사위 조사에서 “당시 이해관계자 간 공방이 거세 사실과 다른 내용의 말들이 돌아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아 (담당부서장인) 사회부장에게는 사실관계를 정확히 알려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당시에도 기사화되는 걸 막으려거나,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진상조사위는 “전 사회부장은 이날 동아일보 보도에 대해 사회부 내 법조팀 기자들에게 아무런 사실 확인을 지시하지 않았다”며 “석 전 총괄의 주장을 들은 뒤, 본인이 따로 객관적 확인을 해보려는 노력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전 사회부장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은 지난 1월 사태가 초래될 때까지 드러나지 않았다”며 “10개월 이상 석 전 총괄이 스스로 회사에 보고하지 않았음에도 사회부장이 이에 대해 아무런 조처나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것 등은 이해충돌 회피 의무 위반에 해당하고 직무를 태만히 하고 결과적으로 회사의 명예를 손상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진상조사위는 한겨레 편집국이 석진환-김만배의 돈거래 사실을 사전에 인지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를 놓쳤다고 봤다.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검찰 출입 기자와 법조팀장 모두 지난해 3월 동아일보 기사에 주목하지 않아 확인 취재나 지시 등을 하지 않았다. 지난해 5월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의 뇌물 혐의 재판에서 남욱 변호사가 증인 신문에서 한겨레 기자와 김만배씨의 돈거래 사실을 말했지만 담당 기자는 “재판을 면밀히 챙기지 않아 이 발언을 놓쳤다”고 진상조사위에 진술했다.
이에 대해 진상조사위는 “보고와 피드백 등 일상적인 취재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한다”며 “이처럼 어느 정도 노출되기 시작한 사실들을 꽤 오랜 기간 동안 한겨레 편집국이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취재정보망에 허점이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대장동 사건’ 기사에서 석진환 개입 여부 확인 못 해
진상조사위는 석 전 총괄의 칼럼, 전 사회부장이 작성한 칼럼과 기사, 대장동 사건 관련 기사 수정 이력 등을 점검한 결과 석진환-김만배의 돈 거래가 기사에 직접적으로 미친 영향은 확인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21년 9월 이후 한겨레 정치·사회·전국부와 대장동특별취재팀 등이 출고한 대장동 개발비리 의혹 관련 기사는 모두 712건이다. 집배신 조사에서 712건 중 석 전 총괄의 열람 이력이 남은 기사는 32건이었다. 진상조사위는 “이 중 15건은 단순 기사 열람만 한 것이고, 17건은 지면에 맞게 분량을 축소하거나 일부 표현을 다듬고 주제와 관련된 사건 내용을 덧붙이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진상조사위, 보고서에 석진환 실명 공개
한편, 진상조사위는 오랜 토론 끝에 보고서에 석 전 총괄의 실명을 쓰기로 결정했다. 앞서 한겨레는 지난 1월7일과 10일 두 차례 사과문에서 전 신문총괄의 실명과 직책을 언급하지 않고 ‘편집국 간부’ 등으로 표기했다.
진상조사위는 “최종 보고서에서는 진상조사위 자체 판단이 필요하다고 보고 원점에서 논의했다”고 밝혔다. 이어 “한겨레는 외부위원들과 함께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사보고서를 공개하기로 했다. 이는 진상조사위 보고서가 한 언론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논의하는 공적 활동의 일환이라고 봤기 때문”이라며 “따라서 외부 공개 취지 및 한겨레 전체가 무겁게 책임을 받아들인다는 차원에서 실명 공개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했다.
한겨레 윤리강령, 개개인에겐 자리 잡지 못해
진상조사위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언론윤리 교육을 비롯해 이해충돌 방지 규정을 구체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또 친분 관계를 중시하는 조직문화와 허점이 드러난 취재·관리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고 봤다.
진상조사위는 보고서에서 “이번 사건은 언론계 종사자 그 누구도 윤리적 성찰의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한겨레 내부 구성원이 뼈저리게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며 “특히 한겨레 간부들의 직업윤리를 점검하기 위한 간부진의 자체 점검과 회사 차원의 구조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한겨레에는 동료와의 친분 관계를 중시하고 구성원을 서로 가족처럼 여기는 내부 지향적 문화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봤다. 이런 문화가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언론인에게 요구되는 고도의 직업·언론 윤리를 해치는 내부 요인이 될 수 있다”며 “수평적·민주적 문화가 내부 구성원의 과오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흐려지는 결과를 초래한 건 아닌지 냉정한 진단과 이에 대한 해결책 모색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지은 기자 jeeniep@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