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은 기자 2023.03.06 17:51:44
현직 기자 10명 중 8명은 일하면서 심리적 트라우마를 겪은 적이 있고, 특히 10명 중 6명은 전화나 이메일, 댓글 공격 등으로 트라우마를 경험했다고 한다. 지난해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여성기자협회가 현직 기자 54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반(反) 언론 정서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언론인들은 날로 교묘해지는 공격과 공세의 대상이 되는데, 특히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여성 기자들에 대한 공격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 같은 온라인 괴롭힘이 여성 기자들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재난적’ 상황이며, 저널리즘 전반의 품질을 떨어뜨릴 수 있으므로 사회적·제도적 개선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3·8 국제 여성의 날을 기념해 주한 유럽연합(EU) 대표부가 6일 ‘미디어 속 여성에 대한 관점’을 주제로 개최한 컨퍼런스에서 참가자들은 ‘여성’ 기자들이 온라인상 공격에서 더 손쉬운 표적이 되고 있다는 데 공감하며 이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게 아니라 언론사 차원은 물론 언론 유관 단체들이 연대하고 협력해서 대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자가 쓴 안보 기사에 “여자가 뭘 알아”
이날 컨퍼런스엔 한국의 주요 신문·방송사에서 일하는 여성 기자와 한국인 외신 기자, 유럽 나라의 대사와 언론인 등이 고루 참석했다. 국적도, 성별도 달랐지만, 이들이 공유한 여성 언론인들의 현실은 닮은 점이 많았다. 뉴스룸의 성비가 거의 균형을 맞춰가고 있지만, 여전히 의사 결정권을 쥔 요직에는 남성이 절대적으로 많고, 미디어에서 인용되는 ‘여성 전문가’들의 비율이 남성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도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스페인 뉴스 통신사 EFE의 안드레 산체스 브라운 기자는 “뉴스에서 여성은 영웅이거나 피해자이거나, 중간은 없다”면서 “남성들이 뉴스룸을 이끌며 데스크로서 기사에 대해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기자’란 말이 아직 쓰이는 데서 보듯, 기자직에서도 디폴트값(기본값)은 여전히 남성이고, 그래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주목받는 일도 많다.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국방, 안보 등의 이슈에서 특히 그렇다. 외교부와 통일부를 오래 출입한 전수진 중앙일보 기자는 “북한 기사를 써도 ‘네가 뭔데’ 이런 댓글 반응이 많다”며 “이 분야는 내가 잘 알고 있고 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많이 숙지하고 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사에 사진을 같이 싣기 때문에 기사에 대한 신뢰성이 더 떨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 서울 주재 기자로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김민주 기자도 “아시아의 여성 기자로서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김 기자는 “한반도 안보 상황은 전 세계 독자의 관심사니까 국방 이슈를 많이 다루는데, 어떤 기사는 한국군에 대한 칭찬만으로 이뤄지진 않는다. 일부 독자가 불편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면서 “그런데 제가 받는 이메일에선 ‘군에 대해 여자가 뭘 아냐’, ‘매국노다’, ‘국가를 팔아먹는 매춘부다’ 이런 비난까지 듣는다”고 했다.
낙태권 같은 이슈나 여성 문제와 관련해 구체적인 사실을 보도해도 “여성이기 때문에 불평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다. 기사의 내용보다 기사를 쓴 기자의 성별을 겨냥해 공격하는 것이다. 권한울 매일경제신문 기자도 “남자 기자가 쓴 기사 댓글엔 기사 자체에 대한 비판이 많은데, 같은 얘기를 여성이 쓰거나 육아, 보육, 복지 등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여성, 엄마, 여기자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며 “여성들이 아직 조직 내부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굉장한 도전 과제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기사 아닌 기자 공격, 노동환경 물론 저널리즘 품질에 영향
하지만 여성 기자들은 자신들을 “주눅 든 피해자로만” 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며 저널리즘의 가치를 실천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혜미 한국일보 기자는 “강조하고 싶은 건 젠더 폭력은 구조적 성차별의 결과로, 저널리스트 개인의 분투와 의지에만 맡겨선 안 된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언론사 리더십이 특정한 젠더나 계급정체성을 갖고 있어 폭력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가장 중요한 건 여성 기자에 대한 온라인 괴롭힘이 젠더 기반 폭력이란 명확한 사회적 규정과 여성 기자들의 노동환경을 안 좋게 만드는 (산업)재해적 요소라는 합의”라고 주장했다.
수자나 바스 파투 포르투갈 대사도 여성 언론인들이 온라인 공격으로 겪는 스트레스는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포르투갈 언론사에서도 많은 여성이 직업에 대한 환멸을 느껴서 기자직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까지 하고 있다”고 전하며 “그런 트라우마와 정신적 타격으로 인해 여성 기자들이 낙담하고, 여성의 시각으로 보도하는 걸 주저하게 된다. 이는 언론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고, 신문과 TV, 라디오 등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는 결국 젠더적으로 균형 잡힌 시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저해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2020년 유네스코와 국제언론인센터에서 여성 언론인 대상 온라인 폭력 심화에 대해 낸 보고서를 소개하며 “25개국에서 범 전문가들이 참여해 만든 보고서에서 무엇보다 제 관심을 끈 건 언론사뿐 아니라 국가 차원이나 정부 차원의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라며 “젠더를 헤이트스피치(혐오표현)에서 하나의 용어로 정의해서 유해한 폭력적 커뮤니케이션에 젠더적 관점이 들어가면 안 되도록 법제화 하는 노력 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민주 기자는 “언론사들이 보수적이고 중립적이며 객관적이란 이미지를 유지하길 원해서 조직 전체가 협박 대상이 되지 않는 이상 (공격에 대해) 어떤 조치를 위하는 것을 주저한다”고 지적하면서도 “이제는 업무 환경 안정과 관련된 부분으로 관점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글로벌 신문사인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도 여성 기자가 공격 대상이 될 때 공개적으로 이들에 대해 지지를 선언했더니, 공격 대응에 도움이 됐다”면서 “기자들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성기자협회나 제가 속한 외신기자협회 같은 단체들도 과거에 공격받는 여성 기자들에 대해 지지 선언을 하기도 했다. 개인적 공격이 아니라 여성 기자들의 활동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