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십 명의 신문, 방송 기자들이 경기 종료 후는 물론 경기 시작 전 연습 시간에도 그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최근엔 시드니올림픽 아시아 예선전을 앞둔 일본 언론마저 자주 모습을 나타낸다. 정상적인 훈련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나 이른 아침(프로야구 선수들은 밤 늦게 경기가 끝나기 때문에 대부분 늦잠을 자는 경우가 많다)에도 그의 핸드폰은 쉴 사이 없이 울린다.
특히 이들 취재진은 대부분 비슷한 질문을 반복, 이승엽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6월 중순까지만 해도 이승엽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여느 스타들과 대동소이했다. 특별한 활약을 펼친 날 스포츠 전문지의 1면을 오르내리고 가끔 종합지 체육면을 장식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이승엽은 여름의 시작과 함께 일약 ‘국민 타자’로 발돋움했다. 이승엽은 연일 시원스런 홈런을 쏘아올리며 무더위와 국민들의 답답한 속내를 단숨에 씻어주는 청량제 노릇을 했다. 여기에다 이승엽은 깔끔한 외모와 세련된 화술, 빼어난 실력으로 언제나 새로운 스타의 등장을 기다리는 언론과 팬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지난 해까지 대표적인 스포츠 스타로 군림했던 박찬호와 박세리의 컨디션 부진도 ‘이승엽 신드롬’에 일조했다.
소속 팀인 삼성은 이승엽이 연일 신문과 방송을 장식, 창단 이래 최대의 홍보 효과를 누리자 완연 잔칫집 분위기였다. 삼성 그룹 각 계열사는 발빠르게 이승엽을 광고 모델로 기용하는가 하면 팬들을 위한 각종 경품을 앞다투어 내놓았다.
하지만 세상에 좋은 일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이승엽은 혹독한 유명세를 치러야 했다. 처음에는 “언론의 관심을 받는 게 오히려 기분 좋다”고 신세대다운 면모를 보이던 이승엽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취재 공세에 지친 기색을 보였다. 특히 48호 홈런을 날린 후 12경기 동안 홈런을 추가하지 못했을 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인터뷰를 거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심지어 “(지금 같으면) 아버지도 보고 싶지 않다”고 극심한 심적 고통을 토로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삼성 구단 안팎의 관계자들과 일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모처럼 등장한 스타를 혹사시키지 말자. 이를 위해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공동 인터뷰를 하는 것이 어떠냐”는의견이조금씩 제시됐다. 하지만 이같은 제의는 “과연 지켜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메이저리그 맥과이어나 소사를 보라. 그 정도는 이겨내야 진정한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주장에 밀려났다.
이승엽을 가까이서 지켜본 기자는 사실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줄 만큼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다. 다만 불필요한 취재 경쟁으로 선수를 비롯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일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2000년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눈앞에 둔 우리 언론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엠바고나 기자단 운영 따위의 관행에 대한 다양하고도 충분한 논의를 해야할 시점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