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의 고발에 따른 검찰의 수사로 SK 최태원 회장이 구속된 가운데 재벌기업에 대한 언론의 감시기능이 소홀하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그동안 언론은 최 회장의 ‘대학강의’ ‘국제회의 참석’ 등 시시콜콜한 동정까지 보도하면서도 이번에 수사의 초점이 맞춰졌던 부당내부거래, 편법상속 의혹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검찰이 집중조사를 벌였던 ‘JP모건과의 이면계약’이 체결된 지난 99년에도 언론은 최 회장이 SK상사와 쉐라톤 워커힐 등기이사로 선임돼 4개 계열사를 거느리는 명실상부한 그룹의 오너에 오른 사실에 더 관심이었다. 당시 언론은 ‘친정체제 강화’, ‘원톱체제’ 등의 표현을 쓰면서도 상속 등 과정상의 문제점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YTN이 지난해 12월 “최 회장이 자신이 갖고 있던 워커힐호텔 주식을 적정 주가보다 비싼 값에 계열사에 팔고 SK의 지분을 크게 늘렸다”는 보도를 했지만 이를 받지 않았고 참여연대가 SK와 최 회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로 고발한 다음날인 지난 9일에도 대다수 언론은 이를 단신처리하는 수준에 그쳤다. 스스로 파헤치지도 않을 뿐더러 시민단체의 제기도 축소보도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최 회장 소환 이후에는 “경제 어려운데…수사확대 우려, 재벌손보기는 통과의례?”(문화) “후유증 걱정되는 SK수사”(중앙), “비위 재벌 모두 손보나”(국민), “군사정권때도 없던 거친 수색”(조선) 등 이번 수사에 대해 부정적인 보도로 일관했다. 기업에 대한 감시와 견제의 기능을 다하지 않고 경제개혁에 대해서는 ‘재계길들이기’식으로 보도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대북송금 의혹이나 지난해 대선과정에서 정몽준 의원이 연루됐던 현대 주가조작 사건 등 정치권에서 발생한 경제기사는 다양한 루트를 통해 발굴보도를 하면서도 정작 재벌의 불법행위 기사는 단순중계에만 그치고 그마저도 축소보도해 최소한의 균형감각도 지키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이번 최 회장 구속의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했던 ‘JP모건과의 이면계약’ 건도 기존 언론이 아닌 인터넷 경제신문 이데일리가 지난해 10월 독점보도한 것이다. 증권업협회와 기업을 출입하는 한 기자는 “이데일리가 보도하기 전 다른 언론사 기자들도 SK와관련한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었다”면서 “경제부처 출입기자들이 재벌 관련해서는 아주 큰 사안이 아니고서는 보고조차 하지 않는 관성에 빠져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언론의 재벌기업 감시기능이 실종됐다는 비판은 이번만의 일은 아니다. 지난 99년 사회·경제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던 ‘대우사태’는 우리 언론의 위기감지 또는 예방보도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그룹이 해체되고 김우중 회장이 해외도피에 나서기 전까지 사회적 파장 등에 대한 언론의 경고성 보도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대우에 위기가 닥친 것은 지난 99년 7월의 일이다. 당시 채권은행단은 만기도래 70억달러의 부채상환을 연기하고 8월에는 급기야 대우에 대한 워크아웃이 결정돼 12개 계열회사가 채권은행단의 관리로 들어가 기업시스템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당시에도 대우사태가 사회에 미칠 여파나 내부의 방만한 차입경영에 경종을 울리기는 커녕 막판까지 김 회장의 전경련 활동, 해외매각 성공설, 대우의 구조조정 과정 등의 보도가 주류를 이뤘다. 대우가 금융위기시에도 방만한 해외사업을 지속하는 한편 무리한 확장전략으로 위기를 자초했다는 비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국민일보 경제부 기자를 거쳐 현재 서울대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제정임씨는 지난해 말 출간한 ‘경제뉴스의 두 얼굴’이라는 책에서 언론의 재벌기업 감시와 예방보도 부재 사례들을 고발했다. 한보는 지난 96년 12월에 사실상 부도상태에 들어가 97년 1월에 최종 부도처리됐는데 대부분의 언론은 이에 대한 예방보도 대신 부도 직전인 10월에도 ‘한보 러시아 가스전 개발’건을 보도하는 등 경보신호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 97년 10월 경영진이 퇴진하고 법정관리에 들어간 기아사태를 다루는 언론의 보도태도도 마찬가지. 그해 8월에 기아 김선홍 회장이 화의를 신청하고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언론은 사회적 파장과 문제점을 짚기보다는 김 회장 사퇴(경향 중앙 한국), 유임(국민 동아)등 김 회장 거취에만 관심을 갖는 보도로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99년 8월 현대그룹 자금 사정이 악화된 ‘현대사태’ 당시에도 언론은 적극적 보도를 자제하다 감출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자 일제히 그동안의 보도관행을 되풀이했다는 게 제씨의 분석이다. 제 전 기자는 99년4월 조선일보가 벤처코리아 99사업 협찬 명목으로 현대증권으로부터 10억원을 협찬받았으며 대한매일은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의 축소편집으로 현대상선의 전면광고를 게재했다는 배경설명도 곁들였다.
이처럼 언론의 기업감시 활동이 사실상 마비된 원인은 재벌광고가 전체광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언론구조와 그에 따른 기자들의 자기검열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한 신문사 산업부 기자는 “재벌기업 광고가 언론사 운영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기자가 재벌에 대해 발굴보도를 한다는 것은 구조상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고 본다”면서 “재벌기업에 대한 문제제기는 크게 하지 않고 설사 시민단체의 고소 등 문제제기가 있을 경우에도 축소보도한다는 자기검열이 배어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한겨레 곽정수 대기업 전문기자는 “일부 언론에서 재벌기업과 관련한 굵직한 문제제기를 해도 대다수 언론들이 받지 않는 것이 관행처럼 돼버렸다”고 지적했다.
일부 언론과 재벌이 소유나 경영형태에 있어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프레시안 박태견 편집국장은 “우리나라 일부 언론 역시 재벌후계과정과 상속의 과정을 거치는 ‘족벌시스템’이라는 점에서 재벌기업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상속과정에서의 변칙 증여 등에 대해 심층적으로 접근해 비판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