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위험사회’에 살고 있다. ‘위험사회’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도입한 개념으로, 부의 분배가 사회의 기본구조로 인식되던 ‘계층사회’와는 다른 성격의 사회를 말한다. 지금은 위험의 관리와 분배가 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위험’ 자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후, 위험이 문제되지 않은 순간은 없었다. 그러나 ‘위험사회’에서 위험은 태풍이나 이웃의 침략과 같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엄습하는 자연현상이나 제3자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결정하고, 원칙적으로는 미리 계산할 수 있는 위험들이 더 크게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다. 전자를 ‘위험’(독일어로 Gefahr, 영어의 danger)이라고 하면 후자는 ‘리스크’(risk)이다. 핵에너지가 백퍼센트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은 체르노빌 사고 이전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적지 않은 국가들이 아직도 이른바 ‘잔여위험’(안전장치를 아무리 완벽하게 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핵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기술발전으로 인류가 얻은 효용을 동반하는 리스크에 대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험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한다. 이것은 송해룡 교수(언론학)와 한스 페터 페터스(위험사회학)가 쓴 책 제목이기도 하다. 이 책은 아직 생소한 이 주제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다. 언론에게 위험커뮤니케이션은 어려운 영역의 하나다. 언론은 고도의 전문적 사안을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 기자가 전문가가 되기는 힘들다. 하지만 기자가 의존하는 취재원인 전문가는 대부분 특정 이해관계에 놓여 있다. 언론은 리스크에 대해 조기에, 그리고 충분히 주목시켜야 하지만, 동시에 관심을 너무 높여도 안된다. 과도한 불안이 비합리적 결정을 낳기 때문이다. 언론이 기술에 대한 맹신을 심어줘도 안되지만 배격도 곤란하다. 기술이 낳은 문제를 기술 도움 없이 해결하기 힘든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위험커뮤니케이션은 과학·기술 영역을 기본 소재로 하지만, 대단히 정치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리스크에 대한 논의는, 안전성을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있는 가에 대한 것이다. 수돗물의 중금속 허용치는 임상적으로 증명된 수치보다 훨씬낮으며, 낮은 정도는 임의성을 갖고 있다. 즉, 정치적 결정이다.
언론은 리스크를 ‘위험’(danger)으로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해하기 편하기 때문일까. 대구 지하철 화재에서도 언론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경황이 없었던, 피해자인 기관사의 행적에 주목한다. 시스템이 아니라 우연히 그곳에 있던 우둔하거나 나쁜 사람들이 문제였다면, 우리는 안심하고 다시 일상에 되돌아 갈 수 있다.
리스크의 사회적 관리를 이제 더 이상 전문가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 ‘위험사회’에서 리스크는 사회 전 구성원의 생존과 삶의 질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리스크에 대한 결정은 궁극적으로 정치적 문제다.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결정은 국민이 참여·평가하는 결정이다. 위험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언론의 주목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