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언론사의 정체성 고민이 한창이다. 대선보도평가, 내부선거, 지면개편 등의 공간에서 편집국 기자들을 중심으로 ‘색깔’과 ‘방향’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체성 고민이 가장 두드러지는 언론사는 문화일보. 문화는 최근 단행하려던 지면개편 시기를 유보했다. “형식적 변화보다 문화일보의 정체성 확립이 중요하다”는 기자들의 요구가 사내전산망을 통해 확산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회부 정치부 국제부 기사의 기획화, 경제부 기사의 생활화와 관련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면서 반응을 체크하기로 했다. 내용상으로는 ‘시대정신에 부합되는 신문’으로 거듭나기 위해 애쓴다는 전략이다. 문화의 이같은 실험은 세계여성의 날이었던 지난 8일 “가정에서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불평등한 삶을 살아온 여성들에게 신문을 바친다”며 모두 13면을 할애하는 ‘파격’을 선보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겨레는 지난 2월 대표이사 선거와 편집위원장 선거때 한겨레가 표방하고 있는 ‘진보적 정론지’에 대한 위상과 정체성 논란이 재연됐다. 한 기자는 “선거마다 ‘여당지’ 논란이 되풀이되는 것은 한겨레가 그동안 진보적 정론이라는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 선거에서 편집위원장에 당선된 김효순 논설위원은 여당지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진보적 정론지로 거듭나겠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힌 바 있다. 한겨레는 오는 22일 주총 이후 편집위원장이 교체되면 대대적인 지면개편을 단행할 예정이다.
한국일보는 대선이후 부장단 회의에서 “공정을 기하되 비판강도를 높이고 논지를 분명히 하자” “객관적이고 기계적 공정을 추구하다보니 색깔이 없다”는 등 논의를 거듭한 끝에 ‘중도에서 진보를 지향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최규식 편집국장은 “젊은 층의 파워가 커진 것이 사실이고 언론이 시대변화를 능동적으로 리드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그런 점에서 한국일보는 중도에서 조금 더 진보를 지향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매일은 지난 1월 논설위원실과 편집국부장단이 정체성 문제를 토론한 결과 ‘온건진보 중도개혁’을 지향하기로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차장급 기자는 “메이저 신문과 비슷해서는 설 공간이 없다는 고민이 있다”면서 “기존과는 다르게 많은 실험도 하고 젊어져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고 전했다.
동아와 조선은 내부적으로 정체성 고민이 구체화되지 않고 있다. ‘합리적 보수’ ‘열린 보수’를 지향하고 있는 동아는 그러나 “합리적 보수의 선을 넘었다”는 지적이 사내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동아는 대선보도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내부적인 이견을 보이고 있는 상태다. 대선보도에 대해 노조와 공보위는 소식지를 통해 공정성과 신뢰성에 문제를 제기했으나 일부 부장들과 편집국장은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 편집국 한 기자는 “정체성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가 없으면 동아의 정체성은 ‘조선과 중앙 사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만 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은 대선 이후 편집국 기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발전위원회’가 지면에 관해 사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독자들이 사설 등 조선의 입장만을 가지고 구독하는 것이 아닌 만큼 적절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나왔으나 내부에서 크게 공론화되지는 않았다. 방상훈 사장은 지난 5일 창간 83주년 기념사를 통해 “독자들의 요구에 맞춰 변화를 추구하고 정보의 품질을 높이는 작업은 계속돼야 한다”면서도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신문의 독특한 색깔과 논조마저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방송사의 정체성 고민은 공영성 강화와 맞물려 있다.
후임 사장 인선을 앞두고 있는 KBS는 인적 쇄신과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개혁적인 인사의 선임으로 공영성을 강화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으며 최근 이긍희 사장을 맞은 MBC는 보도국장 등 내부 인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보도와 관련한 대체적인 방향이 잡힐 것으로 보인다. SBS의 정체성 고민이 가장 눈에 띈다. SBS는 공영성 강화를 위해 공익 프로그램 강화, 진보적 언론학자들의 사외이사 선임 등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