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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벌언론 '가재는 게 편'?

재벌 세습경영 시민단체 비판 못본척, '세대교체'는 부각

전관석 기자  2003.03.12 11: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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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언론이 재벌의 세습경영에 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은 ‘족벌’이라는 구조적 유사점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부자세습 과정을 거친 2세들이 경영을 총괄하고 3세들이 경영수업을 받으며 서서히 경영 일선으로 나서는 재벌과 유사한 족벌구조로 유지되고 있어 비판의 잣대가 무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난 1월에 있었던 재벌 3세들에 대한 승진인사 보도는 이같은 지적을 뒷받침한다.

1월 3일에는 현대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인 정의선씨가 현대자동차 부사장에, 17일에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씨가 삼성전자 상무로 승진해 ‘세습경영’ 체제를 본격화하고 3세 경영의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를 보도한 족벌언론은 다른 언론과 큰 차이를 보였다. 동아 조선 중앙 한국 등 이른바 족벌언론들은 부의 대물림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법적인 세습에 대한 비판보다 “약진하는 40대 경영진”(동아), “40대 임원시대…기술 해외통 전진배치”(조선), “재계 3세경영시대 앞당겨”(중앙) “기업임원 40대 전성시대”(한국)등으로 ‘세대교체’의 의미만을 부각시켰다. 이 시기에 맞춰 ‘뿌리깊은 대물림’, ‘족벌세습경영’ 이라는 주제로 ‘재벌개혁’ 시리즈를 시작한 대한매일과 한겨레 내일신문의 보도와는 대조를 이뤘다.

지난달 27일에는 전국 43명의 법학교수가 서울지검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아들 이재용씨의 편법상속 의혹 고발사건 수사를 촉구했다. 교수들은 “삼성의 불법 세습은 다른 재벌들의 주식 유상증자를 통한 세습관행의 모태가 됐다”며 “지난 2000년 6월 법학 교수 43명이 삼성에버랜드 사모전환사채(CB) 발행을 통한 이건희 회장의 조직적 불법세습 혐의를 검찰에 고발했으나 2년 7개월 동안 검찰은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고 있다”면서 검찰의 즉각적인 수사개시를 요구했다. 그러나 다음날 이 기자회견을 보도한 곳은 경향 국민 한겨레뿐이었다.

그동안 재벌 세습의 병폐는 학계와 시민단체에서 줄기차게 주장해온 사항. 이들의 주장은 “삼성 등 재벌은 변칙적이고 편법적인 재산 증여방식으로 검증없는 후계자 구도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계열사와의 거래를 통해 재산을 부풀려 계열사와 주주들의 손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족벌언론은 IMF 이후 재벌개혁이 화두로 떠오른 지난 98년 초를 제외하고는 재벌의 족벌체제와2세경영에 대한 문제를 심층적으로 부각시킨 적이 없다. 당시 족벌언론은 ‘족벌체제 일가 줄줄이 ‘회장님’/능력 검증 안된 2세 잇단 좌초 폐해도’(조선) ‘황제경영부터 타파하라/능력 검증없는 세습 소유·경영분리 관건’(한국) ‘오만한 황제-2세경영 부실 낳았다’(동아) 등 세습에 대한 문제를 깊숙이 보도했으나 감시의 시각은 계속 유지되지 않았다. 이재용 상무보가 우리사주를 받아 물의를 일으켰던 지난 2000년 7월, 이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던 조선은 오히려 ‘e-삼성으로 재계 데뷔한 이재용씨’라는 인터뷰 기사를 통해 이재용씨의 재계 입문을 부각시켰다.

재벌 세습문제가 공론화된 시점은 지난 2000년. 당시 학계와 시민단체는 ‘재벌의 불법세습 척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재벌의 불법세습과 관련한 검찰고발 1인시위 기자회견 서명운동 등의 활동을 벌였으나 역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 공대위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방송대 곽노현 교수는 ‘미디어오늘’에 기고한 글을 통해 “법학교수들이 누군가를 집단적으로 형사고발한 사례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처음인데도 언론은 이 사건을 철저히 외면했다”면서 “만약 미국의 법학교수들이 빌 게이츠를 배임죄로 형사고발했다면 특파원을 동원해 심층취재 기사를 내보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곽 교수는 “한국의 언론매체는 재벌언론이나 언론재벌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삼성스캔들이 남의 일이 아닐 것”이라며 “규모는 다를 망정 삼성일가의 상속테크닉을 벤치마킹한 죄가 있기 때문에 심기가 편하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윤태영 회장과 2세인 윤석민 SBSi 대표이사의 세습경영과 관련 언론단체의 비판을 받고 있는 SBS 역시 재벌의 세습 문제에 대해 다른 방송과 대조를 보였다. 재벌세습에 대한 시민단체와 학계의 비판이 높았던 지난 2000년 12월 MBC와 KBS가 각각 시사프로그램 PD수첩과 추적60분을 통해 ‘재벌변칙승계’ 의혹에 대해 심층적으로 보도한 반면 SBS는 침묵을 지켰다.

전관석 기자 sherpa@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