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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다시보기] 카파이즘과 또 하나의 전황

방현석 소설가  2003.04.0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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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거창한 이야기를 들먹일 수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 말은 해야만 할 것 같다. 카메라의 위치가 당신을 결정한다.

미국은 이라크를 침략하면서 각국의 영향력 있는 언론사의 취재진을 전선으로 초대했다. 미군의 편의를 제공받고 있는 취재진은 전세계의 거실로 전황을 생중계하고 있다. 전선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해 미군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언론사나 기자들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기자라면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현장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육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

한 병사가 총탄에 맞는, 전율적인 죽음의 장면을 포착했던 종군기자 카파가 한 말이 떠오른다. 만약 당신의 사진에 실감이 없다면 그것은 현장에서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토록 생생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카파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는 결국 베트남 전쟁의 최일선에서 최후를 맞았다. 카파이즘, 그의 이름은 종군기자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도 베트남을 침략한 군대와 함께 움직였던 기자였다. 하지만 그는 편의를 제공해주는 군대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그들이 연출하는 죽은 장면을 담는 데 필름을 낭비하지 않았다.

미군 기지에서 마이크를 잡고 전황을 전하는 기자의 들뜬 목소리에 나는 경악한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그들이 서있는 그 자리에 대한 부끄러움이 없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밤하늘을 수놓는 포탄이 자신의 지붕 위에 떨어지지 않기만을 간절히 빌어야 하는 사람들의 곁이 기자가 서 있어야 할 자리였다는 것을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 보았다면 그 목소리에 비애와 부끄러움이 없을 수 없다.

미국의 발표를 검증과 비판 없이 중계하고 있다는 비판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가 서 있는 자리가 이미 보도의 인격을 규정한다. 바그다드를 향해 발사되는 미사일을 잡은 카메라가 시청자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명중에 대한 기대감이다. 도시의 상공으로 날아드는 미사일을 잡은 바그다드의 카메라에게 얹히는 시청자의 감정은 그 반대이다. 미군기지에 있는 카메라가 ‘알자지라’고 바그다드에 있는 카메라가 ‘CNN’의 것이라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 포위되고 있는 바그다드의 카메라만이 떳떳하다.

폭력을 사용하여 상대를 굴복시키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 그것이 전쟁이다. 미국은 그렇게하기로 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바그다드도, 그곳을 폭격하기 위해 전투기가 발진하는 미군의 항모도 아니다. 미국을 말릴 수 있는 자는 지구상에 아무도 없다. 미국은 손익계산을 다 끝내고 전쟁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제국의 늦은 오후가 어떻게 저물어 가고 있는지를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느껴가고 있다. 미군이 바그다드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에 세계의 양심은 미국을 포위해가고 있다. 카메라가 바그다드에 들어가 이라크 민중의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볼 수 없다면 차라리 더 멀리 빠져나와야 한다. 그러면 또 하나의 전황을 포착하여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포위망에 갇히고 있는 것이 누구인가.